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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중사무실
작성일 2007-11-08 (목)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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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적문화(宗的文化), 그것은 ‘뿌리’다


 

종적문화(宗的文化), 그것은 ‘뿌리’다

‘하동정씨 문성공파종중’ 정기동 회장


 

 강세근 기자 / 2007-11-06 16:56:54


 

ⓒ2007 CNB뉴스  

▲ CNB뉴스,CNBNEWS ,씨앤비뉴스

‘옛것은 봉건사회의 유물’로만 치부할 수 없어


 

 ‘25시’ 작가 게오르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3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그는 한국방문의 소감을 일간신문의 기고를 통해 이렇게 적시한 적이 있었다. “세계 어디에도 한국에서처럼 노인이 존경받는 사회도 없다. 문명화된 나라일수록 노년은 혐오의 대상이며 자동차 공장의 못쓰게 된 부속품처럼 취급받기 일쑤인데 한국은 이와 반대다. 나이를 먹을수록 존경받는다.”


 

그의 말은 십수년이 흐른 현재에도 과연 적중할 수 있을지 조금은 물음표가 던져진다. 경제적으로 풍요해지고 서양문화의 여과 없는 유입은 결국 사회구조의 급속한 변화를 가져오면서 도덕적 가치가 실추되고 개인의 이기만이 팽배해지는 작금의 형국을 초래했다. 또한 그의 한 형태로 변모된 핵가족화는 우리의 고유한 가족제도와 경로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객관적 진단에 의하면 아연 놀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추락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로사상과 가족제도는 자타가 말해주듯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그 인륜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한마디로 ‘옛것은 봉건사회의 유물’로만 치부하고 도외시하면서 바쁜 현대를 살아간다는 핑계가 앞서고 있다. 자연히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편익만을 추구하며 생활하는 것이 대수가 되어버렸고, 급기야 좀 더 광의적인 가족관계,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인륜적 가치의 총체적 위기가 우리 사회 전반에 도래하고 있을 이즈음, 가족제도의 전통을 지키며 윤리와 도덕을 숭상하는 종적문화(宗的文化)의 명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대명제를 실천하는 곳이 있다. 바로 ‘하동정씨 문성공파종중(河東鄭氏 文成公派宗中)’이다.


 

본지는 나날이 허약해 가는 우리의 ‘뿌리의식’에 청량한 경종과 귀감을 선사하고 있는 ‘하동정씨 문성공파종중’ 사무실(會長:鄭冀東,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 55번지 현대 뜨레비앙 227호)을 직접 탐방, 여러 가지 유익한 내용들을 취재할 수 있었다. 퇴근 시각이 임박했을 무렵, 기자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에도 정기동 회장을 비롯한 여러 종원(宗員)들은 업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조상님들의 위업을 기리고 종중의 근본인 종재(宗財)를 조성하는 등 종사관리에 만전을 기하고자 미약하나마 있는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정 회장의 말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엔 젊은이 못지않은 힘이 묻어 있었다. 그는 꽤 두터운 종중 자료들을 챙겨 와 테이블에 앉으면서 ‘하동정씨 문성공파종중’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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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은 우리 후손들의 자긍으로 남아


 

정기동 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하동정씨 문성공파종중’의 내력은 이렇다. 시조(始祖)는 정도정(鄭道正)이며 문성공(文成公)이 중시조(中始祖)이다. 휘:정인지(諱:鄭麟趾)의 위대한 업적과 ‘뿌리’의 정체성을 계승하고 근본의 가치를 숭상하는, 그래서 명실공이 종족문화의 대의를 이루고 이른바 ‘문성공 정신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2004년 6월 13일에 ‘하동정씨 문성공파종중’을 창립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정 회장은 또한 종중의 창립과 더불어 “56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선조 문성공께서 남기신 그 크신 업적에 비하여 너무나 역사에, 세상에,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잘 알려지지 못한 실정에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만시지탄감이야 없지 않지만 존경하는 종현 여러분의 물심양면의 협조로 현재에 이르게 되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넓은 범위의 부계혈연집단을 흔히 종중(宗中)이라 하는데 이 종중에서 다시 갈라진 좁은 범위의 부계혈연집단은 문중(門中)이다. 따라서 정 회장이 말하는 종중은 넓은 범위의 ‘하동정씨’에 속한다 할 수 있다.


 

‘하동정씨 문성공파’가 자랑하는 역사적 인물은 수없이 많다. 그 중 호(號)는 학역재(學易齋)이고 시호(諡號)가 문성(文成)인 정인지(鄭麟趾:1396~1478)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정인지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요 정치가로서 영의정과 원상(院相)을 지낸 인물로 그에 관한 역사적 기록들은 셀 수 없을 정도다.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정인지의 연혁의 화려함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훈민정음’ 창제의 최고의 주역이었다는 데에 종중의 자부와 긍지는 대단하다.


 

특히 문성공이 직접 쓴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들 수가 있는데 이는 정인지, 최항 등이 새로 창조된 훈민정음을 1446년(세종28년), 세종의 명에 의하여 설명한 한문 해설서로서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책 이름을 한글 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 하고 해례(解例)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1940년 경 경상북도 안동 어느 고가(古家)에서 490여년 만에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국보 제70호로 지정(1962.12.20)되었고 현재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한글날이 10월 9일인 것도 정인지가 해례문의 서문(序文)을 쓴 날, 즉 1446년 세종 28년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정한 근거이기도 하다. 이렇듯 ‘하동정씨 문성공파종중’의 조상에 대한 자랑과 자긍은 실로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학역재 정인지의 생애를 좀 더 상세하게 들여다보기로 하자.


 

정인지는 태조 5년(1396)~성종 9년(1478)까지 조선조 초기의 문신으로 대표적인 학자로 태종 14년(1414) 1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성종 6년(1475) 원상(院相)으로 물러날 때까지 60여 년 동안 일곱 임금을 모시며 봉직했고 조선왕조 성립시기엔 왕도의 확립과 관료제도 구축 및 문화기반 조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관직에 나가 사헌부감찰, 예조좌랑에 올랐고 태종의 지우(知遇)를 받았으며 세종 때 고명(顧命)으로 집현전 직제학, 부제학 등 벼슬을 지내면서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공을 세우는 한편 세제개혁, 서적편찬에도 괄목할 만한 업적을 세웠는데 ‘고려사’, ‘용비어천가’,‘치평요람’, ‘왕조실록’, ‘학역재집’ 등도 그의 대표적 저술 업적이다.


 

세조朝에 있어서는 왕권의 어려운 시기에 계유정난의 대책참결, 경국대전 편찬 참여 등으로 왕권의 확립과 관료정치의 확립 등 제도정비에 공헌한바 우의정에 오르고 공신의 칭호와 함께 하동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영의정이 되어 국사를 보살폈다. 그러나 세조의 숭불(崇佛)을 반대하다가 석성으로 유배된 일이 있었고 얼마 안 되어 수환 복귀되었다. 성종 때에는 순성명량경제좌익공신의 칭호를 받았으며 국가의 원로대신으로서 국정을 총괄하는 원상(院相)의 자리에 올라 권신과 공신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워낙 학문이 해박하여 모든 것에 거칠 것이 없었으며 세종의 천문역산(天文曆算)의 뜻을 받아 대소간의 규표 및 흠경보루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가 됨에 조정의 극진한 우대에도 극구 사양하고 물러나니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다.


 

문성공 정신문화의 성역화에 온 열정을 쏟을 터


 

이상으로 정인지의 생애를 살펴 본 바 실로 그가 남긴 발자취는 대단했다. 정문(鄭門)의 긍지와 자부심은 당연한 귀결로 보여진다. 정기동 회장의 명문종통(名門宗統)을 자랑하는 데에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문성공께서는 五子를 두었는데 5형제 모두가 높은 관직에서 국가에 봉사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문(鄭門)의 전성기로 기록될 것이며 이러한 명문거족임을 증거하는 자료는 문성공의 ‘족보발간사’가 입증하고 있습니다.”라며 1709년 기축세보(己丑世譜)로부터 시작하여 2006년 병술족보(丙戌族譜)에 이르기까지 10회째 족보를 발간하고 있다고 예를 들어 주었다.


 

그리고 현재는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든 ‘문성공 정신문화의 성역화’에 대해서도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충청북도 지정문화재(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된 정인지 선생 묘역(사진: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이 성역화되어 조상의 얼을 되새기며 간직하고 보전하여 후손들에게 위선(爲先)교육의 장이 됐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하며 소박한 희망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충북에는 이미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제천 ‘의림지’가 있습니다. 문성공께서 충청도 관찰사 시절에 수축한 것이지요. 이러한 지방문화재는 저희 직계 후손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 모두가 함께 공유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현인들의 지혜와 숨결을 서로 느끼며 지역 간의 공동체 의식이 활발히 전개될 때 우리들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 진다고 생각해요.”하면서 비록 지방에 국한된 기념물에 불과하지만 내용 있는 콘텐츠의 개발로 문화적 가치에 적극 활용하자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동정씨 문성공파종중’의 정기동 회장의 열정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였다. 종사관리에 만전을 기한다는 그는 종원(宗員)들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묘역(墓域), 재실(齋室), 선산(先山), 위토(位土)관리는 물론 시제(時祭) 거행 등의 제반 업무를 총괄하며 오로지 종중의 튼실한 발전을 기원하고 있었다. 조상을 잘 모셔야 된다는 인간 본디의 아름다운 습속이 그에게서도 물씬 풍겨 나왔다. ‘조상이 있고 내가 있다.’라는 강한 뿌리의식이 우리의 삶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리하고 있다. 세월의 험준한 파고가 제아무리 의식에 혼미를 가져준다 해도 적어도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의 인간적 도덕성과 혈연의 역사란, 조상의 발자취가 그러했듯이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동정씨 문성공파종중’의 힘찬 정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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