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河東)의 연혁(沿革)>

 

우리 정씨(鄭氏)는 하동이 본관(本貫)이다. 하동현(河東縣)은 경상우도(慶尙右道) 진주진(晋州鎭)에 속해 있다가 신라(新羅)때는 한다사(韓多沙)라 했고 뒤에 다시 하동(河東)이라 했다가 조선조(朝鮮朝) 태종(太宗)때 남해현(南海縣)과 통합(統合)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고 불렀으며 그후 다시 하동(河東)이라 하였고 현재 행정구역은 경상남도 하동군에 속한다.

 

 

始祖高麗平章事河東鄭公道正之壇碑(시조고려평장사하동정공도정지단비)

 

 

 

 사마온공왈적음덕우명명지중이위자손지계여하동정씨시조평장사공식기인야공휘도정신라지말여경순왕선

 司馬溫公曰積陰德于冥冥之中以爲子孫之計如河東鄭氏始祖平章事公寔其人也公諱道正新羅之末與敬順王先

 후귀순이후일려왕중용위평장사기시공이하동호장조련향병연약이하동일향지근왕거고려승승장구지대세칙

 後歸順而後日麗王重用爲平章事其始公以河東戶長調鍊鄕兵然若以河東一鄕之勤王拒高麗乘勝長驅之大勢則

 기화필지진위어육도탄의이시공내인분함욕이구생영야소위적음덕우명명지중자비야이고공지후손기려불억

 其禍必至盡爲魚肉塗炭矣以是公乃忍墳含辱以救生靈也所謂積陰德于冥冥之中者比也以故公之後孫其麗不億

 이명공거경접종비견우려한천년지간봉군이휘성고려대광보국숭록대부봉금성군휘흥인조선조증의정부영의

 而名公巨卿接踵比肩于麗韓千年之間封君而諱盛高麗大匡輔國崇祿大夫封錦城君諱興仁朝鮮朝贈議政府領議

 정봉하성부원군휘종병조판서봉동평군휘인지오조판서성균관대사성양관대제학영의정봉하동부원군휘현조

 政封河城府院君諱種兵曹判書封東平君諱麟趾五曹判書成均館大司成兩館大提學領議政封河東府院君諱顯祖

 세조부마책좌리공신봉하성부원군휘숭조의금부사이조판서봉하남군휘세호사도관찰사오조판서영의정봉하

 世祖駙馬策佐理功臣封河城府院君諱崇祖義禁府事吏曹判書封河南君諱世虎四道觀察使五曹判書領議政封河

 동부원군휘윤숭정대부판중추부사봉금천군휘충신임란토왜적평괄란부원수판돈녕봉금남군휘빙송화현감벽

 東府院君諱倫崇政大夫判中樞府事封錦川君諱忠信壬亂討倭賊平适亂副元帥判敦寧封錦南君諱빙松禾縣監碧

 동군수죽산도호부사봉금평군시야유십육시휘지연고려도첨의찬성사판선부사시문충휘지예의판서문하평리

 潼郡守竹山都護府事封錦平君是也有十六諡諱芝衍高麗都僉議贊成事判選部事諡文忠諱地禮儀判書門下評理

 삼도체찰사시경열휘종시량양휘인지시문성휘현조시빈정휘숭조시장정휘여창무갑양사화화급천양증우상종

 三道體察使諡景烈諱種諡良襄諱麟趾諡文成諱顯祖諡빈玎諱崇祖諡莊靖諱汝昌戊甲兩士禍禍及泉壤贈右相從

 사문묘시문헌휘세호시효간휘운임란전순우몰운대증병조판서명정려시충장휘광적부제학대사성판중추지경

 祀文廟諡文獻諱世虎諡孝簡諱運壬亂戰殉于沒雲臺贈兵曹判書命旌閭諡忠壯諱光績副提學大司成判中樞知經

 연병란원훈증우상시익정휘봉수병난훈신병조판서시양무휘열임란부이순신막누립기공배어모장군역전순절

 筵丙亂原勳贈右相諡翼正諱鳳壽丙亂勳臣兵曹判書諡襄武諱悅壬亂赴李舜臣幕累立奇功拜禦侮將軍力戰殉節

 시충민휘득열임란사천현감수대공경순절증병조판서시충장휘기인임란좌부장종금천일전순우진주명정려시

 諡忠敏諱得說壬亂泗川縣監樹大功竟殉節贈兵曹判書諡忠壯諱麒麟壬亂左部將從金千鎰戰殉于晉州命旌閭諡

 충렬휘충신시충무휘택뇌이진사복궐청주이첨대비계폐항소극언졸우적소증이조판서명립의열사시충결시야

 忠烈諱忠信諡忠武諱澤雷以進士伏闕請誅爾瞻大妃繼閉抗疏極言卒于謫所贈吏曹判書命立義烈祠諡忠潔是也

 지약밀직부사휘국룡정당문학휘난연증병조판서휘익례조판서휘양명환휘윤서지현영한성좌윤휘육을모재휘

 至若密直副使諱國龍政堂文學諱蘭衍贈兵曹判書諱翊禮曹判書諱穰名宦諱允서之顯榮漢城左尹諱六乙慕齋諱

 여덕동해휘응두송재휘홍수지충의관찰사휘경호조참판휘인귀지은퇴진사휘국교현감휘흥도퇴복당휘현우둔

 餘德東海諱應斗松齋諱弘壽之忠義觀察使諱耕戶曹參判諱仁貴之隱退進士諱國僑縣監諱興道退伏堂諱賢佑遯

 재휘여해춘수당휘수민만강재휘덕하지도학하곡휘운용농포휘상기삼두휘동윤창주휘광연지문행모효재휘문

 齋諱汝諧春睡堂諱秀民晩康齋諱德河之道學霞谷諱雲龍農圃諱尙驥三斗諱東潤滄州諱光淵之文行慕孝齋諱文

 손지효행충청관찰사휘태현숭조화친지불승굴하기성재소위위자손무궁지계자비야수연후삼국전란지제각가

 孫之孝行忠淸觀察使諱泰鉉崇祖和親指不勝屈何其盛哉所謂爲子孫無窮之計者比也雖然後三國戰亂之際各家

 문헌탕일이자공이하휘석숭휘탁신휘의균휘연서사세지생졸배위무전지어분묘역개실호기위자손지재한하여

 文獻蕩佚而自公以下諱碩崇諱卓申諱義均諱延敍四世之生卒配位無傳至於墳墓亦皆失護其爲子孫之齎恨何如

 재영년추문의대기상여지언왈하동오시조득관지향칙기묘의재하동이밀직공묘상재하동칙상기조선지영왕래

 哉令年秋門議大起相與之言曰河東吾始祖得貫之鄕則其墓宜在河東而密直公墓尙在河東則想其祖先之靈往來

 의존우사의내복지우밀직공제실소칭하곡재지후축시조단여주벽우축사위단어기하여소목제지이세일지예방

 依存于斯矣乃卜地于密直公祭室所稱鰕谷齋之後築始祖壇如主壁又築四位壇於其下如昭穆祭之以歲一之禮彷

 불호조손부자회식우일실지중이신리인정구득기안수감이단제지의무거우경이치의기간재간청석문우여자순

 彿乎祖孫父子會食于一室之中而神理人情俱得其安誰敢以壇祭之儀無據于經而致疑其間哉懇請石文于余者淳

 빈성행사도갈력위선감기효심서여우이전지후세

 빈誠行斯道竭力爲先感其孝心敍如右而傳之後世

     단군기원사천삼백이십삼년경오신춘절

     檀君紀元四千參百貳拾參年庚午新春節

                                            後孫 淳霦 謹豎

                                            成均館長 金敬洙 撰

                                            後孫 周相 謹書

 

시조 고려평장사 하동 정공 도정 지단비

 

사마온공은 깊고깊은 마음속에 숨은 덕을 쌓는 것이 자손을 위하는 계책이 된다고 하였다. 하동정씨 시조 평장사공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공의 휘는 도정으로 신라말에 경순왕과 더불어 선후로 고려에 귀순하여 뒷날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공께서 하동호장으로써 향병을 조련한 바 있다. 만약에 하동 한 고을만의 근왕병으로 승승장구하는 고려의 대세에 항거하였더라면 그 화는 필시 끝이 다하여 향민들이 어륙과 도탄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께서는 가까스로 분을 참고 욕을 머금어 생령들을 구하여 살렸으니 소위 명명한 중에 숨은 덕을 쌓았다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이러한 덕으로 하여 공의 후손들이 한없이 아름답게 잘되어 명공과 거경이 뒤이어 일어나고 앞뒤를 가지런히 하여 고려와 조선왕조 천년동안에 봉군된 바 많았으니 휘 성은 고려대광보국숭록대부로써 금성군에 봉해졌으며, 휘 흥인은 조선조의 증의정부영의정으로써 하성부원군에 봉군되고 휘 종은 병조판서로 동평군에 봉군되고 휘 인지는 오조판서 성균관대사성양관대제학 영의정으로 하동부원군에 봉군되고, 휘 현조는 세조 부마로 좌리공신과 하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

 

다음 휘 숭조는 의금부사 이조판서로 하남군에 봉군되었으며 네 개도의 관찰사와 오조판서 영의정을 지낸 휘 세호는 하동부원군에 봉군되고 숭정대부판중추부사 휘 윤은 금천군에 봉군되고 임진왜란에 큰 공을 세우고 이괄의 난을 토평하여 부원수와 판돈녕이 된 휘 충신은 금남군에 봉군되고 송화현감 벽동군수 죽산도호부사를 지낸 휘 빙은 금평군에 봉군됨이 이를 실증한다.

 

또 시호를 받은 분이 열여섯이시니 휘 지연은 고려 도첨의 찬성사 판선부사 시호는 문충이오 예의판서 문하평리 삼도체찰사 휘 지는 시호가 경렬 휘 종은 양양으로 시호되고 휘 인지는 문성으로 시호되었으며 휘 현조는 빈정으로 시호되고 휘 숭조는 장정으로 시호되었으며, 무오년과 갑자년의 두 사화에 그 화가 무덤에 까지 미치고 나서 증 우의정으로 문묘에 배향된 휘 여창은 문헌으로 시호되었고

 

휘 세호는 효간으로 시호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몰운대에서 순절하여 증 병조판서와 정려를 받은 휘 운은 충장으로 시호되고 부제학 대사성 판중추 지경연 병란원훈 증우상 휘 광적은 익정의 시호를 받고 병란훈신 병조판서 휘 봉수는 양무로 시호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막료로 부임하여 수차례 기이한 공적을 세워 어모장군으로 힘써 싸우다 순절한 휘 열은 충민으로 시호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사천현감으로 큰 공을 세우고 순절하여 증병조판서가 된 휘 득열은 충장으로 시호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좌부장으로 김천일을 따라서 진주에서 순절한 후 정려를 받은 휘 기린은 충렬로 시호되었으며 휘 충신은 충무로 시호되고 진사의 신분으로 대궐에 부복하며 대비를 계속 가두게 한 이이첨을 죽이라고 극언으로 항소하다 귀양간 곳에서 일생을 마치어 증이조판서가 되고 의렬사에 배향된 휘 택뢰는 시호가 충결이었다.

 

또한 이어 열거할 분들로는 밀직부사 휘 국룡 정당문학 휘 난연 증병조판서 휘 익 예조판서 휘 양 판관으로 명환이된 휘 윤서의 뛰어난 공적이 있으며 한성좌윤 휘 육을 모재 휘 여덕 동해 휘 응두 송재 휘 홍수의 충의가 있고 관찰사 휘 경 호조참판 휘 인귀의 조용한 물러남이 있으며 진사 휘 국교 현감 휘 흥도 퇴복당 휘 현우 돈재 휘 여해 춘수당 휘 수민 만강재 휘 덕하의 도학이 있고 하곡 휘 운룡 농포 휘 상기 삼두 휘 동윤 창주 휘 광연의 문행이 있으며 모효재 휘 문손의 효행이 있고 또 충청관찰사 휘 태현의 숭조화친이 있다. 모두다 헤아릴 수 없으리 만큼 많다. 그 번성함이 어째서인가?

 

자손을 위한 무궁한 계책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후손들에 끼친 공의 음덕이 이와 같으나 후삼국 이후 많은 난리들로 인하여 각 집안에 전해오던 문헌이 모두 없어져 버린 허물로 하여서 공으로부터 그 아래 휘 석숭 휘 탁신 휘 의균 휘 연서 사대의 생졸과 배위가 전해지지 않을뿐더러 무덤 또한 모두 돌봄을 잃어서 그 자손들의 한스러움이 많았다.

 

올해 가을 문중의 논의가 크게 일어나 서로 말하기를 하동은 우리 시조께서 득관한 고장으로 그 분묘 하동에 있을 것이 당연할뿐더러 밀직공의 무덤이 하동에 있어 온 즉 생각건대 조상의 영혼이 여기에 의존하여 오갈 것이다. 이에 하곡재라고 일컫는 밀직공의 재실 뒤편에 땅을 가려서 시조단을 쌓아 주벽과 같게 하고 또 네 분의 단을 그 아래에 쌓아서 매년 제례를 지내면 사당의 소목제례와 흡사하여 조손과 부자가 한 곳에 계시는 격이다.

 

이로써 신의 도리와 사람의 정리가 다함께 편안함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누가 있어 감히 단에 제사지내는 의식이 경전에 근거가 없다고 하며 감히 의심할 것인가!

 

나에게 이 비석의 글을 써달라고 간곡히 요청한 분은 순빈이다. 그는 유도를 성실히 행하고 조상을 위하여 애쓰는 바 그 효심에 감동하여 삼가 위와 같이 써서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단기 기원 사천삼백이십삼년 경오 신춘절

  성균관장 김경수가 글을 짓고 후손 주상이 삼가썼으며 후손 순빈이 세우다.

  국역주관 하곡도선산보존회 회장 찬문

   번역협찬 용현

 

<하동정씨의 시조(始祖) : 휘(諱) 정도정(鄭道正)>

 

 ● 하동정씨(河東鄭氏)의 시조(始祖)는 휘 도정(諱 道正)으로 현리(縣吏)였으니 삼한말기(三韓末期)의 인물(人物)로 추정(推定)한다. 호걸(豪傑)스럽고 무용(武勇)이 뛰어나서 하동전역(河東全域)과 고을 백성(百姓)을 통합(統合)하고 공부(貢賦)를 나라에 바치니 그로 인(因)하여 그 고을 호장(戶長)이 되었고 자손(子孫)이 번성(繁盛)하니 본관(本貫)을 삼은 것이다.

 

 ● 고려(高麗)가 통합(統合)할 때 그 고을을 지키고 있었으니 그 현(縣)에 어른을 호장(戶長)이라 했고 병마(兵馬)를 통솔(統率)하는 자(者)를 장교(將校)라고 불렀으니 능(能)히 병마(兵馬)를 통솔(統率)할 수 있으므로 고려(高麗)가 통일(統一)하려 할 때 솔선(率先)해서 협력(協力)하였다. 대개 향리지족(鄕吏之族)은 공거(貢擧:추천함)나 역시(歷試:과거에 급제함)를 거쳐 사족(士族)이 되는 것이다.

 

 ● 우리 정문(鄭門)이 하동(河東)을 본관(本貫)으로 한 것은 휘 도정(諱 道正)으로부터 이고 1세 휘 석숭(諱 碩崇)까지는 세대(世代)가 분명치 않아 실전(失傳)이라는 두 글자를 남겨야 했다.

 

 ● 휘도정(諱道正)은 삼한말엽(三韓末葉)에 단련향병(團鍊鄕兵)으로 그 명성(名聲)이 높았던 어른이다.

     세대(世代)를 참고해 보면 문성공(文成公)까지는 11대밖에 되지 않으니 고려(高麗) 34왕(王) 500년이 어찌 11대 밖에 되지 않겠는가. 그간의 대수(代數)가 의심(疑心) 되는바 없지 않으므로 휘 도정(諱 道正)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휘 석숭(諱 碩崇)으로부터 대수(代數)를 세워 1세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참고자료: ①1800년간행 하동정씨 경신대동보 서문

                                                     ②1996년 발행 하동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