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의 성씨(姓氏)는 고대 부족사회(部族社會)로 부터 사용한것 처럼 알려지고 있으나 사실은 삼국시대(三國時代) 신라(新羅) 초대(初代) 왕(王) 박혁거세(朴赫居世)때 부터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기록(記錄)에 의하여 성제도(姓制度)가 발상(發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경주지역(慶州地域)에  위치한 육개지역촌장(六個地域村長)이 회동(會同)하여 혁거세(赫居世)를 王으로 추대(推戴)하여 국호(國號)를 신라(新羅)로 하여 건국(建國)하였다.

 

  ● 그 후 삼대(3代) 서기 32년(유리왕(儒理王) 8年)에 육촌장(六村長)에 정, 이, 최, 손, 설, 배(鄭 , 李 , 崔 , 孫 , 薛, 裵 )등 6個姓을 하사(下賜)하여 경주 동쪽 진지촌(珍支村)의 촌장(村長)이 되었고, 그 육개촌중 수장(六個村中首長)이 지백호(智白虎)이다. 그는 건국좌명공신(建國佐命功臣)이 되었고 그후 낙랑후(樂浪候)에 봉(封)해 졌으며 정(鄭)씨라는 성(姓)을 하사(下賜)받았다. 그런데 현이십팔개(現28個) 정문(鄭門)이 다 그분의 후손설(後孫說)이 있으나 사료부족(史料不足)으로 그 정부(正否)를 가리기 어렵다.

 

  ● 각(各) 씨족(氏族)의 연원(淵源)을 살펴보면 서기 1600~1700年代에 족보(族譜) 편찬때부터 알수 있다. 각 씨족이 공(共)히 저명(著名)한 위인(偉人)을 기원(起源)으로 시조(始祖)나 중조(中祖)를 삼아 찬보(纂譜:족보편찬)하게 되었다.

 

  ● 우리 하동정씨(河東鄭氏)도 서기 900년경 탄생(誕生)하신 휘 도정(諱 道正) 평장사공(平章事公)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공(公)께서는 성장(成長)하심에 체구(體軀)가 장대(壯大)하고 사려(思慮)가 명석(明晳)하며 학문(學文)이 출중하고 위풍당당(威風堂堂)한 어른이시었다.

      신라 경순왕(新羅 敬順王: 서기927~935年)때 하동(河東)의 호장(戶長)이 되시어 그 지역을 수호(守護)하였는바 신라의 쇠운(衰運) 후(後) 백제(百濟)의 침범(侵犯), 고려(高麗)의 건국(建國)등이 교차(交叉)하는 혼란기(混亂期)에 그 지역의 성주(城主)로서 서기 935년 고려조(高麗朝)에 귀의(歸依)하니 태조왕건(太祖王建)이 점점 중용(重用)하여 문하부평장사(門下府平章事)까지 승진 하시었다.

 

  ● 우리 족보(族譜)를 살펴보면 시조 (始祖)후 일세(一世)를 30년으로 계산하면 근 200년의 공간(空間)이 생기는바 대수(代數)로 환산(換算)하면 5~6代를 실전(失傳)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오세손(5世孫) 휘 국룡(諱 國龍) 증밀직부사(贈密直副使)때부터 중흥기(中興期)에 접어들어 육세손(六世孫) 휘 지연(諱 芝衍)께서는 문공서화(文工書畵)의 당대(當代) 명인(名人)이었고 使臣으로 원(元)나라에 수차 다녀오며 국교정상화(國交正常化)에 공헌하였고 중대광도첨의(重大匡都僉議)를 지냈으며 文忠公의 증시(贈諡)를 받았다. 칠세손(7世孫) 휘 익(諱 翊)은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팔세손(8世孫) 휘 을귀(諱 乙貴)는 증좌찬성(贈左贊成), 구세손(9世孫) 휘 흥인(諱 興仁)은 영의정(領議政)을 추증받는등 정문(鄭門)의 중흥기(中興期)를 보냈다.

 

  ● 우리 정문(鄭門)의 전성기(全盛期)는 십세손(十世孫) 문성공(文成公) 휘 인지(諱 麟趾) 때 부터라 할 수 있다.

      공(公)은 서기 1396년(태조 5년) 출생하시어 5세부터 글을 읽히시고 16세때 생원시장원(生員試壯元) 19세때 문과장원(文科壯元) 32세때 중시장원(重試壯元)하였으며 내외정무(內外政務)에 혁신(革新)과 선정(善政)을 하여 육조(六朝)를 거쳐 오판서(五判書)와 영상삼회(領相三回)에 이르는 벼슬을 하셨다. 문성공(文成公)께서는 높은 관직에 계시면서 치평요람(治平要覽), 훈민정음(訓民正音), 자치강목(資治剛目), 사륜요집(絲綸要集),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역대병요(歷代兵要), 고려사(高麗史) 및 절요(節要) 등(等) 많은 책(冊)을 편찬하여 정치(政治), 문학(文學), 종사(宗社), 국방(國防)에 기여하였고, 역법개정(曆法改正),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대소간의(大小簡儀), 역대이동론(歷代異動論) 등(等)을 저술(著述) 또는 제작(製作)하여 천문, 지리, 산학(天文, 地理, 算學) 등(等) 과학발전(科學發展)에 이바지 하였고, 국악(國樂)의 체계를 확립하여 아악(雅樂)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왕명(王命)으로 전분육등(田分六等), 년분구등(年分九等)의 세법(稅法)을 제정하여 재정(財政)과 백성공영(百姓共榮)에 이바지한 功勞로  정난공신(靖難功臣), 좌익공신(左翼功臣), 익대공신삼등(翊戴功臣),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훈록(勳錄)을 받고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으로 봉군(封君)되고 문성공(文成公 )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문성공(文成公)께서는 5자(五子)를 두어 광조(光祖), 현조(顯祖), 숭조(崇祖), 경조(敬祖), 상조(尙祖) 등 5형제(5兄弟)가 모두 높은 관직(官職)에서 국가(國家)에 봉사(奉仕)하니 우리 정문(鄭門)의 全盛期로 기록될 것이다.

 

  ● 우리 정문(鄭門)의 씨족발전사(氏族發展史)를 개관(槪觀)하면 시조(始祖) 휘 도정(諱 道正)으로부터는 천년의종통(千年의 宗統)을 이어오고 있으며 중조(中祖)의 문성공(文成公) 휘 인지(諱 麟趾)로 부터는 600여년의 명문종통(名門宗統)으로 이어오고 있다.

 

  ● 이러한 명문거족(名門巨族)임을 증거(證據)하는 자료는 우리 족보발간사(族譜發刊史)가 立證하고 있으니 좀 더 상세한 것은 자료실의 문헌자료에 써있는 족보서문(族譜序文)과 발문(跋文)을 참고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