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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2-07-02 (월)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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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총설

 

<세종>조 한글창제 대제학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총설

 

<세종>조에 집현전 대제학을 지내신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 선생은 신라 6촌장을 지내신 세가(世家)의 적손(嫡孫)이시며 고려시대 도정(道正)을 시조(始祖)로 하는 하동 정가(河東 鄭家)의 천년 세가(千年 世家) 공덕을 받아 조선시대 1396년(태조 5) 12월 28일 을묘시에 태어나셨다.

 

 

문성공 정인지 선생 근영

* <세종>조에 집현전 대제학으로 한글창제 협찬,

용비어천가 찬술 등 문풍발전에 기여하였다.

부친(父親)되시는 <흥인(興仁)>은 내직별감(內直別監)을 하셨고 모친(母親)되시는 흥덕 진씨(興德 陳氏)는 중랑장(中郞將) <진천의(陣千義)>의 따님이시다. 공(公)이 탄신(誕辰)하기까지 부친 <흥인>이 소격전에 나가 “가문을 일으켜 세울 훌륭한 아들을 하나 달라”고 지성으로 소원하였는데 모친 진씨가 잉태하여 태어나셨으니 그 상서로움이 천만대를 가고도 남을 만하다. 5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쳐 한번만 보면 읽고 쓸 줄 알아 천재라는 소문이 이웃에 자자하였으며 모친 진씨는 가세(家勢)가 빈천하심에도 불구하고 자식 잘되기를 소원하며 소학(小學)을 가례(家禮)의 귀감으로 삼아 공(公)을 엄격하게 교육하셨다. 이 같은 부모님의 덕업(德業)에 깊은 감명을 받은 공(公)은 평생 동안 소학을 베게 밑에 놓고 주무시면서도 논행(論行)이 흐트러지지 않으셨으며 또한 효행(孝行)을 만행의 근본으로 삼으셨다. 스스로 자(字)를 백휴(伯睢)라 하셨으니 맏아들로서 눈을 부릅떠 세상을 올바르게 보겠다는 뜻을 세우셨고 호(號)를 학역재(學易齋)라 하셨으니 세상 살아가는 주역(周易)의 이치를 깨달아 온 세상을 밝히겠다는 뜻을 세우셨다.

 

<태종>조 1408년(태종 8) 13세 때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당대 대유학(大儒學)으로 소문난 <권우(權遇)>의 문하에서 수학하셨고 성균관 입학 3년 째 되는 1411년(태종 11) 16세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생원(生員)이 되셨다. 그리고 1414년(태종 14) 19세에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또다시 장원급제하여 종6품의 품계인 예빈시 주부(禮賓侍 主簿)가 되어 관계(官界)와 인연을 맺으셨다. 이후 승문원 부교리(承文院 副敎理)·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예조 좌랑(禮曹 佐郞)· 병조 좌랑(兵曹 佐郞)을 역임하셨다. 그러나 관계에 입문하여 초년은 그리 순탄하지 않아 승문원 부교리 시절에 사대문서(事大文書)에 날인이 잘못되어 의금부에 투옥되기도 하셨고 병조 좌랑 시절에 비상동원령 잘못으로 탄핵을 받기도 하셨으며 명나라 사신이 입국함에 황색의장을 걸지 않아 또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기도 하셨다. 그리고 취각(吹角)하는 병사들을 잘못 훈련시킨 죄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셔 고난의 세월을 보내셨다. 이러한 와중에도 공(公)은 언제고 의연함을 잃지 않으셨고 남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으니 위로부터 아래 모두가 공(公)을 신뢰(信賴)하였다.

 

<세종>조 1420년(세종 2) 상왕인 <태종> 임금이 대소신료가 모인 어전에서 공(公)을 앞으로 나오게 하시고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훌륭한 인재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정인지>는 이 일을 충분히 해낼 인물”이라고 하시며 성군(聖君)이신 <세종> 임금에게 천거하셨다. 이 일이 있은 후 공(公)은 <세종> 임금의 신임을 받아 군무 기강을 담당하는 병조 정랑(兵曹 正郞), 예절과 예술을 관장하는 예조 정랑(禮曹 正郞) 그리고 관직 인사를 관장하는 이조 정랑(吏曹 正郞) 등을 역임하셨으며 이 시절에 <황희>· <맹사성>· <변계량>· <조말생>· <정초>· <윤회>· <신개>· <이맹균> 등 후(後)에 재상 또는 대제학에 오른 많은 명사(名士)들을 만나 친분을 맺고 교우하셨다. 공(公)은 요직(要職)에 오래 있으셨으나 거만하거나 아첨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 전보다 더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시고 촌보(寸步)도 사(私)가 없으시니 사람들이 공(公)을 가리켜 장차 대성(大成)할 분으로 여기시었다. 1422년(세종 4) 당대의 준재(俊才)들이 모여 일하는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집현전 응교(集賢殿 應敎)가 되셨고 1423년(세종 5) 당감(唐鑑)을 집필하셨으며 춘추관 춘추(春秋館 春秋)를 겸직하셨다. 1424년(세종 6) 집현전 직전(集賢殿 直殿)이 되셨고 1425년(세종 7) 대제학(大提學) <변계량>이 공(公)을 가리켜 사학(史學)에 밝다고 천거하여 그 때까지의 역사를 바르게 정리하셨고 <박연> 등과 아악· 당악· 향악의 모든 악기· 악곡· 악보 등을 통합 정리하셨다. 1427년(세종 9) 예문관 응교(禮文館 應敎)를 겸직하여 왕세자빈 죽책문(王世子嬪 竹冊文)을 지어 바치셨고 특별 승진시험으로 시행된 중시(重試) 문과에 또 다시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집현전 직제학(集賢殿 直提學)에 오르셨다. 이는 조선조 최초로 과거에 세 번 모두 장원급제한 기록을 남기신 것으로 이때부터 사람들이 “글 하면 정인지”라고 하였다. 공(公)은 집현전을 대표하는 최고의 실력가(實力家)로서 입지를 세우셨으나 오히려 “학문은 하면 할수록 아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고 하시면서 겸손해 하시니 모든 선비들이 공(公)의 겸손함으로 하여금 알고 모름의 척도로 삼았다. 공(公)은 <김종서>와 서연(書筵)의 서장관(書狀官) 겸 검찰관(檢察官)으로서 학문지도와 공직기강을 바로잡는 일에도 참여하였으나 이는 잠시 뿐이었으며 곧 세자시강원 좌필선(世子侍講院 左弼善)을 겸직하여 세자 시절의 <문종>· <세조>· <안평대군> 등을 가르치기도 하셨다. 1428년(세종 10) 33세에 집현전 부제학(集賢殿 副提學)에 승진하여 당상관(堂上官)의 반열에 오르셨으며 <세종> 임금에게 경서를 강독하고 질문에 답변하는 경연(經筵)의 시강관(侍講官)도 겸하게 되어 천문지리 등에 있어 많은 자문을 하여 과학발전에 이바지하셨다. 또한 과거시험에 시관(試官)으로서 <황보인>· <설순> 등과 대독관(代讀官)이 되어 독권관(讀券官) <맹사성>· <허조> 등을 도와 많은 인재를 선발하셨다. 1430년(세종 12)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提)가 되셨고 집현전 제학(集賢殿 提學)을 겸직하면서 아악을 정리하여 아악보(雅樂譜)를 완성하였고 서문(序文)을 찬진하셨다. 1431년(세종 13)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 빈객(世子 賓客)을 겸직하셨고 역법인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운행 계산법인 칠정산 내편(七政算 內篇)을 찬진하셨다. 공(公)은 과학에도 통달하셨던 분으로 <세종> 임금에게 계몽산(啓蒙算)을 시강하였고 계산을 함에 한 치의 오차도 없으셨으며 과학기구 제작(製作)에도 남다른 깊이가 있으셨다. 이를 지켜 본 <세종> 임금이 이르기를 “<정인지>만이 천문 우주를 함께 의논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공(公)에게 명(命)하여 <정초>· <이순지>· <이천> 등과 과학기기 발명에 있어 이론과 제작원리를 담당하게 하셨다. 1432년(세종 14)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이 되셨고 춘추관 동지사(春秋館 同知事)를 겸하셨으며 이 때 간의(簡儀),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규표(窺票) 등을 시험하고 개발하는데 과학 이론을 제공하였다. 공(公)은 당대를 대표하는 독보적 문사(文士)로서 시관(試官)으로 참여해서는 시권(試券)의 필서(筆書)를 보면 공부한 양을 알 수 있고 뜻을 보면 해독(解讀)의 깊이를 헤아리시니 모든 시생(試生)들이 두려워하면서도 부러워하였다. 따라서 공(公)이 선발한 사람 중에 집현전에서 관록을 쌓아 성공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공(公)을 가리켜 생명과도 같은 은인(恩人)이자 스승이라 하여 은부(恩傅)라고 하였다. 공(公)은 관직의 중책을 맡아 밤낮으로 일 하시면서도 언제고 고향에 홀로 계신 부친을 잊지 않으시어 벼슬길을 접고 낙향(落鄕)하려 고심을 하셨다. 이내 공(公)이 결정을 내려 부모를 공양하고자 사직을 상언하셨으니 상소문에 “신(臣)은 나이 13세에 부모를 멀리 떠나 성균관에 유학하다가 이어서 등제(登弟)하여 벼슬을 받들어 어버이를 봉양할 겨를도 얻지 못하였던 때에 자모(慈母)를 일찍 여의였고 이제 편부(扁父)의 나이도 70이어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지만 길이 막히고 소식이 드물어 첨망(瞻望)하는 생각이 마음에 간절하옵니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세종> 임금은 윤허하지 않으셨다. 1433년(세종 15) 다시 부모공양을 위해 사직을 상언하시니 상소문에 “신(臣)이 어릴 때부터 부모의 슬하를 멀리 떠나서 한 해라도 어버이 곁에 모시고 있음을 얻지 못하였는데 자모(慈母)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슬퍼하여도 따를 수 없으며 홀로 있는 아비가 또 나이 70이 넘었는데 병환이 갑자기 일어났으니 남은 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하셨다. 이에 <세종> 임금은 앞으로 “역마를 주어 틈틈이 돌아보게 하겠다.”고 하시며 역시 윤허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공(公)은 이를 왕명(王命)이자 하늘의 명(命)으로 받아들여 섬기기를 다하였으니 왕실(王室)과 의정부(議政府)의 많은 대신들이 “공(公)의 효성(孝誠)스러움에 탄복하였고 충성(忠誠)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하였다.”고 한다. 얼마 후 인수부 윤(仁壽府 尹)에 임명되셨고 <정초> 등과 천문이론에 대한 고전을 연구하여 과학적 이론을 정립하여 <이천> 등이 천문관측기구 혼천의(渾天儀) 등을 제작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셨다. 1434년(세종 16) 이조 좌참판(吏曹 左參判)에 임명되셨고 다시 예문관 제학이 되셔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찬집하셨다. 1435년(세종 17) 성균관 가대사성(成均館 假大司成)에 특임되어 명나라 사신(使臣)을 접대하셨고 이해 40세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 觀察使)에 제수되시니 목민관(牧民官)으로 제천 의림지 등을 보수하셨고 양민을 규휼하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세종> 임금도 “정인지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한 사람이다.”라고 칭하하셨다. 1436년(세종 18)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쳐서 곡식을 받는 일종의 빈민구체책으로 사창(社倉)의 설치를 주창하셨으며 영동 현감(縣監)이 일은 하지 않고 놀기만 즐기자 임금께 상언하기를 “이런 사람을 두고는 하루도 관찰사를 할 수 없다.”고 하여 현감이 파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친이 작고하시어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으로서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자 <정분>에게 관찰사 직을 인계하고 부여 석성에 있는 부모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상제(喪祭)를 치르셨다. 공(公)은 목민관으로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빈궁(貧窮)하지 않도록 하셨고 부모를 찾아 자식 된 도리를 다 하셨으니 천세토록 공(公)의 얼이 빛나고 있다. 1438년(세종 20) 공(公)이 상중에 있어 벼슬길에 오를 수 없게 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기신 <세종> 임금이 공(公)을 특별히 기복(起復)시키고자 기복출의첩(起復出依牒)을 내려주시니 형조 참판(刑曹 參判)에 서용되셨다. 1439년(세종 21) 예문관 제학에 다시 임명되시자 사대문서(事大文書)를 참예하여 그 동안 밀렸던 국가 대소사를 일거(一擧)에 정리하시니 이를 보고 놀라지 않는 관리가 없었다. 1440년(세종 22) 다시 형조참판에 전임되었으나 <세종> 임금이 형조 판서인 <정연>에게 묻기를 “경을 대신할만한 자가 누구냐.”고 하자 <정연>이 “<정인지>가 재주와 덕망이 출중합니다.”라고 천거하여 45세에 형조 판서(刑曹 判書)에 제수되셨다. 이해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게 되자 나라를 대표하는 문한(文翰)으로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을 겸직하셨다. 조종(朝宗)에 많은 관직이 있지만 공(公)이 대제학에 올랐다고 하는 사실은 학자로서 명예의 최고봉이자 가문의 영광이며 그 존귀함이 극에 달했던 자리로서 만 백성이 우러러 선망하는 자리에 오르신 것이었다. 이해에 중추원(中樞院) 지사(知事)에 임명되셨고 사은사로 역법· 아악· 음운서 등 외국 문물 서적을 다수 들여와 보급하기도 하셨다. 1441년(세종 23) 풍수학 제조(風水學 提調)에 특임되어 있을 때 경복궁(景福宮) 명당 터 논의가 분부하여 일부에서 옮기자고 하였으나 공(公)은 이를 반대하여 이전하지 않게 하셨다. 1442년(세종 24)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에 제수되시니 집현전 대제학과 함께 양관 대제학(兩館 大提學)을 하시면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찬진하셨다. 1443년(세종 25)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 제조(提調)에 특임되어 전국을 다니면서 전품(田品)을 심사하셨고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 등의 기초를 마련하셨다. 1444년(세종 26)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도 도체찰사(三道 都體察使)에 특임되어 전품을 심사하던 중 남원의 광통루를 보시고 그 경관이 “달나라에 있는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와 같다.”고 하여 광한루(廣寒樓)라고 이름을 바뀌어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이어 내려오게 하셨고 함평의 관정루(灌頂樓) 기문(記文)을 남기셨으며 파주의 광탄(廣灘) 찬시(讚詩) 등을 쓰셨다. 당시 전품을 심사하여 등급을 정하는 것은 국가로 보면 부국(富國)의 요체이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민생(民生)과 민원(民怨)이 상존하고 있어 누구도 쉽게 이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公)은 대제학의 신분으로 “모름지기 학문이 있어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을 배워 무엇에 쓰려는 것이냐”고 하시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몸소 실천하셨다. 1445년(세종 27) 의정부 우참찬(議政府 右參贊)에 제수되셨고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하셨다. 서문(序文)에 “다스린 자는 일어나고 어지러운 자는 망하나니, 얻고 잃음이 함께 지나간 역사에 실려 있고, 착한 것을 본받고 악한 것을 경계함은 권장하고 징계함이 마땅히 후인에게 보여 줍니다.”라고 하셨다. 이때 공(公)의 자급이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우참찬·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우빈객 등 여러 관직을 겸하셨다. 그리고 <세종> 임금이 3년전에 창제하신 훈민정음 28글자의 음운체계를 활용하여 한글로 된 최초의 서책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찬진하셨으며 본문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므로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냇물이 이르러 바다에 가나니”하는 대목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이 해에 대제학으로서 문형(文衡)을 맡아 나라의 문한(文翰)을 총괄하기도 하였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할 인물로 <홍응>, <최항>, <박원형>, <김수온>, <서거정>, <유성원> 등을 천거하셨다. 1446년(세종 28) 예조 판서(禮曹 判書)에 제수되셨고 한글창제 최고 책임자인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집현전 응교 <최항>, 부교리 <박팽년>·<신숙주>, 수찬 <성삼문>, 돈녕부 주부 <강희안>, 행집현전부수찬 <이개>· <이선로>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협찬하여 반포하게 하였다. 공(公)이 찬진한 훈민정음 서문에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끝말에 “정통(正統) 11년(1446) 9월 상한(上澣) 자헌대부 예조 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자우빈객 신(臣) 정인지 삼가 씀” 이라고 하여 여기에 기록된 9월 상한이 오늘날 한글날을 10월 9일로 결정하게 된 역사적 근거를 남기시었다. 1447년(세종 29) 이조 판서(吏曹 判書)에 제수되셨고 <소헌왕후> 영릉지문(英陵誌文)도 찬진하셨다. 지문에 “왕후는 자상하고 어질고 성스럽고 착하신 것이 천성에서 나와 중궁(中宮)의 자리에 앉으신 뒤로 더욱 겸손하고 삼가 하여 빈첩(嬪妾)들을 예의로 대접하고 아래로 궁인(宮人)들에게 이르기까지 어루만져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셨다. 또한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당연직의 과거 시관이 되어 중시(重試)에 집현전 출신 <성삼문>· <김담>· <이개>· <신숙주>· <박팽년>· <최항> 등을 선발하셨고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찬시(讚詩)도 쓰셨다. 공(公)은 언제고 “집현전이 잘 되어야 나라가 잘 된다”라는 신념을 가지시고 학사들의 행실을 질책하고 계도하셨으니 모든 학사들이 “<정인지>를 통하지 않고는 되는 일이 없다.”고 할 만큼 절대적이셨다. 1448년(세종 30) 태조실록(太祖實錄)을 총감수하여 개수 하셨으며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 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세자우빈객· 성균대사성을 겸직하셨다. 1449년(세종 31) 공조 판서(工曹 判書)에 전임되셨고 전에 있었던 고려사가 소략하자 <세종> 임금이 고려사 편집관(編輯官)을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찬진하였다. 1450년(세종 32) 명(明)나라 사신(使臣) <예겸>이 왔을 때 사신접대 총책임자로 관반청사(館伴廳事)가 되셨고 집현전 직전 <성삼문>, 집현전 응교 <신숙주> 등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양국의 문물과 제도에 대하여 논의하셨다. 이때 몇날 며칠을 공(公)과 대면하였던 <예겸>이 공(公) 에게 이르기를 “그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10년 동안 글 읽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였다.

 

<문종(文宗)>조 1450년(문종 원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 左參贊)에 체직되고 하위직급에 있던 사람이 공(公)보다 먼저 위로 올라가니 사론(士論)이 좋지 않아 다시 공조판서에 전임되셨다. 그러나 공(公)은 관직에 대해 추호(秋毫)도 욕심을 내지 않았으며 주역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하늘의 순리(順理)를 쫓아 세상을 사는 것에 만족하시니 세인(世人)들이 공(公)을 가리켜 대인(大人)이라고 하였다. 1451년(문종 1) 춘추관 지사(春秋館 知事)를 겸직하면서 고려사에 근거하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찬진하였다. 1452년(문종 2년) 세종실록(世宗實錄)을 찬진하였고 조선의 지리 및 문물 등을 총 망라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도 함께 찬집하였으며 <세종> 임금의 영릉비문(英陵碑文)도 찬진하였다.

 

<단종>조 1452년(단종 원년) 병조판서(兵曹 判書)에 전임되셨고 이 때 재상 등 대신(大臣)들이 군사를 풀어 사사롭게 사저(私邸)를 증축하자 이에 부당함을 지적하셨다. 그러나 얼마 후 한직(閑職)이라 할 수 있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체직되셨다. 공(公)은 성품이 온유하시면서도 기개가 대쪽 같아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시고 잘못을 지나치는 일이 없으시니 모든 대소신료가 두려워하여 근신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대책(大策)을 참결(參決)하시고 <수양대군>이 세상을 평정하니 영의정(領議政) <수양대군>의 천거로 57세에 좌의정(左議政)에 제수되셨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훈되셨으며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지셨다. 또한 병법(兵法)에도 조예가 깊어 역대병요(歷代兵要) 찬집에 협찬하셨다. 1454년(단종 2) <수양대군>의 딸 의숙공주(懿叔公主)를 며느리로 맞아들여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으셨다. 공(公)은 “신권(臣權) 정치를 배격하고 왕권(王權) 정치를 치국(治國)의 정도(正道)”라고 하셨던 분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세론(世論)에 의기투합하는 사람을 보시고 소인배(小人輩)라고 하시면서 자식들에게도 이를 훈계하셔 세정(世情)을 모르고 사는 것을 가문의 덕목으로 여기게 하셨다.

 

<세조>조 1455년(세조 1) 60세에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領議政)에 제수되시니 조선조 최초로 장원급제자가 영의정 자리에 오르는 기록을 남기셨다. 그리고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책훈되셨으며 세자사(世子師)도 겸직하셨고 문종실록(文宗實錄)을 찬진하셨다. 1456년(세조 2) 단종복위 운동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집현전 후학(後學)들이 이에 관련되어 사형되고 집현전이 혁파되자 30여년 동안 집현전에 몸 담고 이를 이끌어온 대부(代父)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영의정을 사직하는 걸해골(乞骸骨) 상소문을 올리셨다. 상소문에 “신(臣)이 날로 점점 쇠하고 늙어서 이가 빠지고 눈이 어두우며 정신이 잊기를 잘하고 두풍이 때로 발작하여 걸해골하여 병을 조섭하고 다스리고자 합니다.”하였으나 <세조> 임금은  이를 윤허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사육신 등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된 자들이 쇠담금질 문초(問招)를 당하자 공(公)이 어전에 나가 아뢰기를 “전하, 그들은 영원히 전하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셨으니 이는 집현전 후학들이 소신에 의해 행동하는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공(公)이셨기에 문초가 부질없음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단종>과 <세조> 연간에 왕위 계승이 양위냐 찬탈이냐를 놓고 가치관이 혼돈되면서 충절과 변절 그리고 옳고 그름으로 세론(世論)이 이분(二分)되었을 때도 공(公)은 “누구나 나라의 부름을 받기위해 함께 공부한 선비라 할지라도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 그 가는 길을 두고 서로 말하지 않는 것이 선비된 도리요 신하된 도리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엇은 옳고 무엇은 그르다고 하여 다툼이 있을 때면 “행여 아는 것에 비해 기(氣)가 넘침을 경계하고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셨다. 1458년(세조 4) 중삭연(仲朔宴)과 기로연(耆老宴) 연회석상에서 불서(佛書) 간행을 반대하면서 <세조> 임금에게 “임금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불사만 전념하니 하루도 보전하기가 어렵다.”고 질책을 하셔 임금과의 갈등을 노정(路頂)하였다. 그리고 <세종>에 이어 <문종> 그리고 <세조>에 이르기까지 왕실이 불사를 일으키는 것을 보시고 끊임없이 홀로 반대하셨으니 이는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을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한 정당성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1459년(세조 5) 공(公)이 임금과 불교논쟁을 벌이면서 “내가 그대를 그렇게 가르쳤느냐”고 따져 묻자 임금에 대해 불경(不敬)하였다는 논쟁이 장기화 되면서 영의정 직을 사직하셨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명예며 관직 등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시고 부여에 부처(付處)되셨으나 얼마 안 있어 풀려나 다시 부원군 군호(君號)를 환급받으셨다. 역사에 임금을 두고 “그대”라는 말을 쓰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공(公) 혼자뿐이시니 공(公)은 도도함과 당당함의 평상심을 한 번도 잃지 않으셨고 언제고 의연하게 행동하셨다. 1462년(세조 9) 충훈부 당상(忠勳府 堂上)에 특임되셨고 1464년(세조 11) 명(明)나라 사신이 왔을 때 가관관(假館官)에 특임되셨으며 대원각사 낙성법회에도 참석하셨다. 1466년(세조 14) 며느리 <의숙공주>와 오대산 상원사 중창 낙성식에 참석하셨고 금강산 유점사 대종 봉정식에 참석하여 대종기(大鐘記)를 쓰셨다. <세조> 임금은 공(公)이 귀양까지 갖다 오면서도 맑으나 궂으나 한결같이 조종을 섬기는 것을 보시고 치하하여 나이 70세 이상의 권신(權臣)에게 특별히 주는 궤장(杖)을 하사하셨다.

 

<예종>조 1469년(예종 1) 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한 공로로 익대공신(翼戴功臣) 3등에 책훈되셨고 공신록에 기록하기를 “익대 3등 공신 <정인지>의 후손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함이 있을지라도 유사가 영세에 미치게 한다.”하였다. 이해에 <세종> 임금의 영릉을 여주로 옮기게 되자 천릉도감(遷陵都監) 제조(提調)에 특임되어 풍수지리를 총괄하셨고 이해 74세에 마지막으로 과거 시관을 하였다. 공(公)은 춘추가 연로(年老)하심에도 사서오경을 즐겨 암송하셨고 시관이 되어서는 눈을 감고 듣기만 하여도 급제자를 골라내시니 사람들이 “시관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배운 사람이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성종>조 1470년(성종 1) 국가의 원로대신으로서 국정을 총괄하는 원상(院相)에 특임되셨다. 1471년(성종 2) 어린 임금을 잘 보필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훈되셨고 큰아들 <현조(顯祖)>가 좌리공신 1등 그리고 작은 아들 <숭조(崇祖)>가 좌리공신 3등에 각각 책훈되셔 3부자(三父子)가 공신이 되셨다. 이후 노년(老年)은 정원(庭園)에 나가 전지(田地)를 돌아보시면서 자연을 벗 삼아 농부들과 막걸리를 즐겨 드셨고 불사(佛事)를 일으키려다 세상을 뜬 의숙공주를 위해 시전공양에 전념하셨으며 승가사(僧伽寺) 찬시(讚詩)를 지으셨다. 1478년(성종 9) 조정에서 그동안의 공(公)의 공적을 기려 왕의 스승으로 모시는 삼로(三老)에 추대하려 하였으나 공(公)이 임금에 아뢰기를 “노신(老臣)은 그저 조용히 지내기만 소원할 뿐입니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해 11월 25일 마지막으로 아들, 딸, 손자, 증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너희들은 언제 어디서고 하동부원군 자손임을 명심하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춘추 83세로 생을 마감하셨다. 공(公)이 영면(永眠)하시자 나라에서 조정을 철조(輟朝)하고 부물(賻物)을 내려 예(禮)로서 장사지내게 하였으며 사후(死後)에 공(功)이 있는 자에게 내려주는 시호(諡號)를 문성(文成)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도(道)와 덕(德)을 널리 깨달아 글이 높으셨던 분으로 죽는 날까지 섬기기를 다하여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성공(文成公) <정인지> 선생은 한민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으나 효심이 지극하고 글재주가 뛰어나 초년은 효자(孝子)로서 중년은 학자(學者)로서 그리고 말년은 정치가(政治家)로서 대성(大成)하여 부(富)와 명예(名譽)와 권력(權力)을 함께 한 분이시다. 그리고 가문을 빛낼 아들을 소원하셨던 부친의 뜻을 받들어 조선 최고의 명문가(名門家)를 만드시고 600년 세가(世家)의 존귀함을 한 몸에 받으신 분이시기도 하다.

 

공(公)은 생원시, 문과, 중시에 3번 모두 장원한 급제자로서 학풍이 뛰어나 당대에 편찬된 모든 서적이 공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만큼 많은 저술의 업적을 남기셨다. 그리고 성품이 호한하고 영매하여 남과 다툼이 없으셨고 또한 그런 다툼을 받아주지도 않으셨으며 처세와 처신에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언제고 마음을 다스려 자신의 행동을 경계하시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직언하시니 후학은 물론 왕실도 두려워하여 거유(巨儒)라고 칭송하였다. 그러면서도 <태종>에서 <성종>까지 7대 성조(聖朝)를 섬기시며 예문관 대제학과 집현전 대제학을 하셨고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병조판서 5판서를 두루 하시면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 반열에 올랐다고 하는 사실은 오직 대의(大義)에 충실했던 공(公)의 성품이 있으셨기에 가능하였던 일이라고 하겠다. 1414년(태종 5) 문과에 장원급제하셔 1478년(성종 9) 공직에서 물러나시기까지 65년간 국가를 위해 봉직하셨는데 이중에 30년을 집현전과 함께 하시면서 12년간 집현전 대제학을 맡아 국가의 문한을 주관하셨고 과거시험 시관(試官)이 되어서는 문과와 중시(重試)를 통해 역사적 인물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담>· <최항>· <이석형>· <김예몽> 등 많은 인재들을 선발하였다. 또한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후학의 명망을 받아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고려사, 고려사절요, 치평요람, 삼강행실도, 사륜요집, 칠정산 내편, 아악보, 역대병요, 회례문무악장, 세종실록, 세종실록지리지, 문종실록 등을 찬진, 협찬하셔 우리나라 문풍발전에 지평을 열게 하셨다. 또한 천문 우주과학에도 조예가 깊어 <정초> <이천> <이순지> 등과 혼전의, 일성정시의, 간의, 규표 등을 제작하였고 이들 과학기기 설치 누각인 흠경각, 보루각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세종>조에 도입한 수학서 계몽산을 처음으로 해독하여 임금에게 산수(算數)를 시강하였고 <성종>조에 음악서 율려신서(律呂新書)를 <정인지> 혼자만이 알고 있다고 하여 임금이 다른 사람에게 이를 전하여 후세에 남기도록 하였다. 또한 중시 장원급제 책문에서 공법(貢法) 설치를 설파하여 후에 예문관 대제학 시절 전제상정소 제조, 도순찰사에 특임되자 4년간 전국을 돌면서 전품을 심사하여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의 세법을 확정하여 민생을 안정시켰다.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선생은 조선 초기에 있어 학자로 입신하여 <세종>임금의 총애를 받아 문필대가의 명망을 얻었으나 <문종>임금 이후는 정치가로 입신하여 불교와 유교논쟁에 휘말리면서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갈등 속에 계유정난, 단종복위거사 등을 만났어도 치졸(稚拙)함을 보이지 않으시어 민심안정에 기여하였다.

 

공(公)이 이르기를 “학자는 청죽(靑竹)과 같아 선비로서 현실정치를 경원하여야 하지만 정치가는 노송(老松)과 같아 길손에게 비바람을 피하고 쉬어갈 거처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를 몸소 실천하셨다. “학자의 길과 정치가의 길이 다르다”는 이 한마디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2년   7월   1일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18대 후/ 정 찬 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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