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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
禹洪 忠臣孝子 旌門事蹟(정 우홍 충신효자 정문사적)
(위치
: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신지리)
공(公)의
자(字)는 중징(仲徵)이요 통덕랑(通德郞)을 지내셨다. 河東이 본(本)으로
영의정(領議政)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문성공(文成公) 정 인지(鄭
麟趾)의 11대손(代孫)이요 이조판서(吏曹判書) 하남군(河南君) 정 숭조(鄭
崇祖)의 10대손(代孫)이요 전주(全州) 경기전(慶基殿) 참봉 정 희팔(鄭
希八)의 7대손(代孫)이요 증호조참의(贈戶曹참議) 정 기장(鄭 基章)의
증손(曾孫)이요 증호조참판(贈戶曹참判) 정 신원(鄭 信元)의 손자(孫子)요
중추부사(中樞府事) 정 진발(鄭 震發)의 3男이시다. 1713년(肅宗 39年
癸巳)에 태어나셨다
공(公)은
하늘이 낸 효자(孝子)로서 어린철로 부터 어버이를 효성(孝誠)으로 섬김이
알려졌다
나이
겨우 11세(歲)에 아버지가 갑자기 중병(重病)으로 위경(危境)에서 정신을
잃자 상분(嘗糞)하고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빌며 호소하여 그 아버지는
마침내 회춘(回春)하셨다
또한
어머니가 중병(重病)으로 천어(川魚)를 먹고자 하시거늘 바로 엄동설한(嚴冬雪寒)의
겨울철이었다 냇물은 얼어붙어 아무 계책(計策)이 나지 않는지라 울부짖으며
어쩔줄 몰라 하셨다.
이때에
얼음이 절로 갈라지며 한 마리 잉어가 얼음 위로 뛰쳐 나온지라 잡아서
어머니 병구환을 하셨다
그
후 19세에 또한 아버지가 득병(得病) 생치(生雉)를 자시고자 하시나
저자가 멀고 들녘에 살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구할 길이
없어 구병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때
한 마리 꿩이 날아 뜰 아래에 내린지라 잡아서 올려 아버지 병을 물리치셨다
어버이를
뫼심에 철따른 의복과 조석(朝夕) 음식을 부부(夫婦)가 힘을 합해 정성껏
봉양(奉養)했다
또한
어버이가 하고자 하시는 일은 한 마음으로 그 뜻을 받들어 어기는 일이
없어 집안이 화목 화평하였다
그런데
1734년(甲寅) 5月11日 어머니가 괴질(怪疾)에 걸려 축시(丑時)에 갑자기
운명할 지경에 이르렀다 온 집안이 황황해서 울며 가슴을 치며 어쩔줄을
몰랐는데 공(公)은 조용히 밖으로 나가 목욕(沐浴)한 후 하늘에 빌고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어머니 입에 넣으셨다
인시(寅時)에
끊겼던 명(命)이 다시 회생하여 13年 동안 건강한 모습으로 지나시다가
천명(天命)을 마치시니 공(公)은 3年을 시묘(侍墓)하셨다
1742년(영조
18년 壬戌) 2月에 조정(朝廷)에서는 공(公)의 출천(出天)의 효행(孝行)을
듣고 특명(特命)으로 정문(旌門)을 내리시니 그 효성(孝誠)을 표창하려
함이었다
이듬해인
1743년(癸亥)4月 관청(官廳)에서는 조정(朝廷)의 영(令)을 받들어 공(公)의
마을에 정려(旌閭)를 짓게 하고 또한 관청(官廳)에서 현판(縣板)을 만들어
큰 글씨로「효자(孝子) 정 우홍지정려(鄭 禹洪之旌閭)」라 하고 이달
초 7日(庚寅)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크게 풍악(風樂)을 베풀고 문에
거니 또한 현창(顯彰)하려는 특명(特命)의 은전(恩典)이었다
공(公)은
31세(歲)의 젊은 나이에 정문(旌門)을 얻게 되었음은 기이(奇異)한 일이다.
비록 효(孝)를 다하고 죽어도 포전(褒典)을 입지 못한 분이 세상에 많거늘
공(公)은 살아있을 때 이같은 정문(旌門)으로 은전(恩典)의 영화를 입음은
더욱 희귀한 일이다
1776년
영조대왕이 붕(崩)하시자 능(陵) 아래 초막(草幕)을 세워 소식(素食)과
곡읍(哭泣)으로 3年을 지나고 돌아오니 전주(全州) 사인(士人)들이 성상(聖上)께
아울러 정표(旌表)토록 아뢰었다
공(公)은
1785년(正祖 9年 乙巳)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73이셨다
1789년(正祖
13년 己酉)에 집안 조카 수황(遂璜)은 삼가 짓고 종손(從孫)인 성렬(聖烈)이
삼가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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