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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파보서(丁酉派譜序)및 역문(譯文)(1957년) 서기 1957년(丁酉年)에 발간한 구보 서문 사람이 족보를 가진다는 것은 친족간에 화목하는 도라하겠다. 그 근원을 살펴보면 참으로 오래 되었으니 인생으로써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위로는 시조(始祖)로부터 아래로는 그 후손에 이르기까지 수백 대 의 내력이 소연히 한눈으로 볼 수 있 을 것이다. 만일 족보가 없다면 종손 지손(支孫)이 누구인지 각 파와의 근원(根源)을 알 수 가 없으며 일일이 찾아가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니 얼마나 복잡한 일인가? 아! 우리 정씨는 우리나라에서 이름있는 씨족으로 방방곡곡에 아니 사는곳이 없고 인구 또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니 대동보를 간행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만일에 대동보를 간행하려고 한다면 몇 해가 걸릴는지 헤아릴 수 가 없고 지금 형편으로 보면 국토는 남북으로 갈리었으니 북쪽에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며 남북간에는 왕래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인데 어떻게 단합이 될 수 있겠는가? 여러 족친들이 모여서 의논한 결과 문성공파의 파보를 하자고 하니 그렇게 하자는 결의를 거절할 수 없었고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그렇게 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니 때에 따라서 수보(修譜)함이 옳을 것이다. 신미년 파보의 예에 따랐고 각 처로 부터 수단을 모아보니 성(姓) 본(本) 생사(生死) 년 월 일 에 틀리는 곳이 혹간 있어서 여러번 통지을 하였으나 아직까지도 결말을 못보고 있으니 이것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많이 들으면 의심이 풀어진다 하였고 또 알지 못하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 아는 것이라 하였으니 모르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 세상이 어지러워지니 세상은 아침 저녁으로 급변하여 내일이 어찌될지 모르는 형편이나 족보를 간행하려는 마음 또한 급해졌도다. 비용 등 모든 절차는 옛 관례에 의하여 발간을 서두르게 되었으며 농포(農圃)공과 도정(都正)공 두 분이 발간한 예에 따라서 간행 하였으니 시조 할아버지 이하 지금까지의 내력을 밝히고 여러 파로 나뉘게 된 이유도 여기서 알게 될 것이며 이것이 우리 문중이 서로 친목을 도모하게 되는 길이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국가를 위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붓을 놓는다.
정유년 1957 년 9 월 상한 丁酉年 1957 年 九 月 上澣
십육대 종손 순민은 삼가 서 하노라 十六代 宗孫 淳民은 삼가 序 하노라
정유파보 발문(丁酉派譜跋文) 및 역문(譯文)(1957年) 서기 1957년 (丁酉年)에 발간한 구보 발문
아득한 옛날에 천하가 생기고 그 위에서 인생이 살었으니 인생이 사는 곳에 씨족이 있고 씨족이 있는 곳에 반드시 족보가 있나니 족보는 나라의 역사와 같은 것이다 나라에 역사가 없으면 어느 시대를 거쳐 어떻게 지내왔는지 또 정치는 어떻게 하였는지 알수가 없고 씨족게에 족보가 없으면 서열을 알수가 없고 종손 지손을 구별할 도리가 없다. 이는 주(周)나라 때부터 그 소목을 밝히였고 송(宋 )나라 때에 소로천(蘇老泉-노천은 호요 이름은 소순(蘇洵)이다)은 족보가 있어야 한다고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우리 하동정씨는 옛날에는 족보를 간행하지 못하였다가 정조(正祖) 경신년에 농포(農圃)공이 처음으로 족보를 간행하였고 그 후 신미년까지 다섯번 족보를 간행하였다. 여러 족친(族親-일가)들은 八道에 흩어져 살면서 족보를 공손히 모시고 대대로 전하여 오는 가보로 삼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경인(庚寅)년에 6.25 동란을 만나서 큰 변을 당하여 족보를 잃어버린 사람도 있을 것이오 혹은 불에 태워 없어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니 지금 살아있는 족친 가운데에서 족보를 모시고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는가? 신미(辛未)년 부터 금년까지 햇수를 헤아려 보면 27年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으니 오래된 세월이라고 할 수 밖에 없도다 나도 그동안 족보를 간행해야 한다고 간절히 느끼었으나 일이 거창하여 뜻을이루지 못하였더니 작년 겨울 문성공 기일에 부여 진천 두 곳에 살고 있는 여러 족친들이 부여 신기정(新基亭)에 회동하여 족보간행을 결의하고 역원을 선출하였는데 그때 나에게 총무(總務)의 중책을 맡기니 내 비록 그만한 재목은 못되지만 족보는 조상님을 위하고 후손들을 위하는 사업이기에 의리상으로 보아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 후부터 경향각지를 돌면서 의견을 모으고 돌와와서 즉시 족제(族弟) 운채(雲采)와 찬하(燦夏) 병기(丙基)등 에게 각각 책임을 맡기었더니 일이 차츰 차츰 두서가 잡히어서 시작한지 7개월만에 완공을 보게 되었으니 조그마한 힘도 뭉치면 크다는 것을 알었도다. 내 불행하게 생각하는바는 산과물도 옛과 달라졌으니 南北이 갈라져서 우리 종친이 대동단결하지 못하고 근근히 수단을 모은것이 파보(派譜)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사람의 행 불행이 모두 천지조화의 운수에 맡길 수 밖에 없는 일이니 사람의 힘이나 지혜를 가지고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 어찌 하리오. 끝으로 원하는 것은 여러 족친들은 파보라 하지 말고 대동보로 보고 족친간에는 더욱 더 친목을 도모하고 물 흐르듯 흘러온 근원을 찾고 그 파계는 어떻게 뻗었는지를 살펴보면 조상을 받들고 족친을 공경하려는 마음이 자연히 생기게 될 것이니 다시 중언부언 하지 않겠고 간단하게 족보 간행에 대한 전말을 기록하면서 조상님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족보를 모시어 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정유년 1957년 9월 상한 丁酉年 1957年 9月 上澣
후손 석채는 삼가 발 하노라 後孫 錫采는 삼가 跋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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