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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파보서(辛未派譜序) 및 역문(譯文)(1931년) 서기 1931년(辛未年)에 발간한 구보서문 아! 이것이 하동정씨의 족보로다. 우리는 옛날에 족보를 간행하지 못하였는데 七代조 농포(農圃)공이 처음으로 족보간행을 시작하여 六代조 보덕(輔德)공이 수단을 모았고 五代조 도정(都正)공이 간행하여 반포하였으니 이 족보가 경신(庚申)보요 그 후 증조부 현감(縣監)공이 중간(重刊)하였으니 이것이 을사보(乙巳譜)다. 그 범례(凡例)가 정정당당하여 족보를 만들때의 표본이 될만하다. 족보를 펴보면 종족의 거처를 분명하게 알수가 있고 百세(世)가 되었어도 이는 한 집안이요 몇 百 몇 千명이 서로 파를 달리하였어도 그 조상은 하나라 어찌 효제지김이 없을손가. 유연히 솟아오르리라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왕고(王考) 통덕랑(通德郞)공이 을해보(乙亥譜)를 속간하였으니 을해년은 벌써 五十七년 전이다. 그동안 인생의 변혁은 무상하여 子子孫孫 번성하였을 것이니 年 卒 官封 墓所 등을 기록하지 않으면 우리 종중의 한이 될 것이오 그리하여 다시 족보를 간행하기로 결정을 보았으니 이것은 시기로 보아서 적당한 때라고 생각한다. 나도 선조(先祖)때부터 맡아온 일을 하려고 하나 별로 아는바도 없어 망서리었으나 여러 종인(宗人)의 권유로 교정의 일을 보아왔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금년 여름에 장자가 세상을 떠나 모든 것을 잊고 두문불출 하였다. 생각하니 족숙(族叔) 창석(昌錫)씨와 여러 유사(有司)가 시종(始終) 수고를 하여 주었으며 나에게 글을 한마디 쓰라고 하니 도의상으로 보아 사양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왕고께서 쓴 서문을 두손 모아 공손히 읽어보니 문중에서 간행한 족보는 우리 집안이 대대로 이어받아야 할 귀중한 문적(文籍-글)이라 하였으니 나 역시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중시조 이후로 여러 대를 겪는 동안에 높은 덕을 쌓아서 이름이 사방에 날리기도 하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되기도 하고 도학과 문장이 뛰어나서 역사에 광명을 뻗치기도 하여 천하에 손꼽히기도 하였다. 훌륭한 사적을 기록하여 업적을 살피기도 하고 조상님이 한일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여러 파(派)가 모두 합심하여 대동보를 간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유감스러운 일이며 간단히 족보간행에 대한 내력을 적어서 신미년에 족보를 간행하는 뜻을 밝히고저 한다.
신미년 1931년 월 일 辛未年 1931년 月 日
후손 통훈대부 탁지부세입징수관 순학은 삼가 서 하노라 後孫 通訓大夫 度支部歲入徵收官 淳學은 삼가 序 하노라
신미파보 발문(辛未派譜 跋文)및 역문(譯文) 서기1931년(辛未年)에 발간한 구보 발문
하동정씨는 동방거족으로 삼한시대에 처음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고려시대에는 더 유명 하였으니 이것은 뿌리가 튼튼하면 가지가 번성하고 근원이 먼 강은 흐름도 길다는 이치라 하겠다. 그 후 덕망과 功勳으로 시호(諡號)를 받으신 어른도 있었으니 소자(小子)같이 견문이 없는 자가 감히 매거(枚擧)할 수도 없으며 학역재(學易齋)선생 즉 문성공은 업적과 공훈이 역사에 남아 있으니 다 쓸래야 쓸 수가 없다. 이로부터 먼 후손까지 계계승승 선조의 후광을 입었으니 예를들면 빈정공(빈玎供) 장정공(莊靖公) 도헌공(都憲公) 효간공(孝簡公) 익정공(翼正公) 충장공(忠壯公) 충결공(忠潔公) 여러 선생이오. 문장과 덕행(德行)으로 나라에 혹은 충절로 굳은 절개를 가지고 五륜三강을 잘 지키어 이름이 높기도 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했도다. 익정공(翼正公)후에 농포공(農圃公)이 있었으니 경세제민(經世濟民)하는 포부가 계시어 사림(士林)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그 덕행(德行)과 의리심(義理心)은 우리 문중의 동량(棟梁)이라 하겠다. 각 파를 통합하여 대동보(大同譜)를 강행하였으니 그 규모나 조리가 정연함을 알 수 있다. 공의 아들 손자 증손 고손이 그 뒤를 이어서 족보를 간행하여 그 빛을 더욱 윤택케 하였으니 지금 전하고 있는 족보가 바로 그 족보며 서문만 읽어보아도 알 것이다. 연대가 너무 심원하고 자손들이 여러 고을에 산재하니 파별과 연대 봉작 생 졸 묘소 등을 판별할 수가 없다면 후생에게 한이 되지 않으리오. 나는 이 점이 두려워서 十여년 동안 첨종을 편방하여 중의를 모아서 보소를 양주(楊州) 재사(齋舍-재실)에 차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十九개월만에 간행을 끝마치게 되었으니 이것은 선조의 음덕이요. 힘없는 후손들의 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가사람 호부랑(戶部郞) 순학(淳學)군이 농포공 후손으로서 가훈이 있어 이미 간행의 전말을 밝혔고 불초한 나는 충결공(忠潔公)의 九세손이다. 외람하게도 몇 마디 적어서 족보의 끝에 부치는 바이다.
신미년 1931 년 월 일 辛未年 1931 年 月 日
후손 창석은 삼가 발 하노라 後孫 昌錫은 삼가 跋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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