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대동보 서(乙巳大同譜序) 및 역문(譯文) ( 1845年 )

을사대동보 서 기 1(乙巳大同譜 序 其 一) 의 역문( 譯文) (1845년)

씨족(氏族)들이 족보(族譜)를 보유한 것은 종친(宗親)을 친(親)히 하는 의(誼)라 씨족(氏族)이 번성(繁盛)하면 가(可)히 족보(族譜)가 없어서는 아니되고 족보(族譜)가 없으면 원근(遠近)의 분별(分別)을 밝힐 수 없으며, 족보(族譜)가 있으면 가(可)히 중간(重刊)치 않을 수 없고 중간(重刊)치 않으면 계서(繼序)의 분별(分別)을 밝힐 수 없다.

원(遠)과 근(近)의 구분(區分)과 계서(繼序)의 차별(次別)이 족보(族譜)로 말미암아 밝혀지니 족보(族譜)란 것이 씨족(氏族)에게 중대(重大)하지 않는가.

아! 우리 종족(宗族)이 본래(本來) 이 나라에서 의관(衣冠:양반)한 씨족(氏族)이라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로부터 이제에 이르러 이정(彛鼎)에 명(銘)하였고 규조(圭祖)가 서로 이어 도학적전(道學嫡傳)의 현(賢)도 있었으며 충효(忠孝) 탁이(卓異)의 행(行)도 있어 그 범열함을 말하면 실(實)로 족보(族譜)가 있고 없는 것을 기다릴 필요(必要)가 없다.

그러나 연대(年代)가 이미 오래되었고 후예(後裔)가 점점 번성(繁盛)하여 여기저기 산거(散居)한 자(者)가 그 수(數)를 알지 못하니 이 족보(族譜)가 없으면 장차(將次) 무엇으로 계서(繼序)의 분별(分別)을 밝히리오. 우리 종족(宗族)이 경신보(庚申譜)가를 편찬(編纂)한 이유(理由)가 이 까닭이라. 아! 우리 종친(宗親)으로 하여금 경신보(庚申譜)가 없으면 경신(庚申) 이전(以前)에 선조(先祖)와 방조(傍祖)의 묘소(墓所)와 관봉(官封)을 무엇으로서 다 알며 유복(有服)하고 무복(無服)한 일가들을 어찌 다 분간하랴.

씨족(氏族)에게 족보(族譜)가 있는 것은 대개 다 그런 까닭이다. 그러나 경신(庚申) 이후(以後)에도 자(子)가 손(孫)을 낳고 손(孫)이 아들을 낳았으니 족보(族譜)를 불가불(不可不) 속수(續修)하여야 했다. 그러나 할 일이 많아 그럭저럭 착수치 못한지 오래더니 이에 작년(昨年) 봄에 제족(諸族)들과 합의(合議)하여 인쇄(印刷)를 시작한지 18개월만에 끝이 났으니 그 규모(規模)와 범례(凡例)는 경신년(庚申年) 족보(族譜)에 의존(依存)하였다. 본보(本譜)에 실린 파계(派系)가 경신보(庚申譜)보다 많으니 우리 선조(先祖)들께서 적덕(積德)하고 인(仁)을 후(厚)히 하셨음을 가(可)히 징험(徵驗)할 수 있고 보책(譜冊)을 한번 열람(閱覽)함에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나오도다. 창조(創造)함이 있으면 계수(繼修)함이 정리(正理)이니 이제 우리 족보(族譜)를 계수(繼修)함에 불초(不肖) 내가 마음에 느낀 바가 있다. 우리 종친(宗親)들에게 옛 족보(族譜)가 없었다가 우리 고조부(高祖父) 농포공(農圃公)께서 기초(起草)하고 증조부(曾祖父) 보덕공(輔德公)께서 수정(修整)하시고 조부(祖父) 도정공(都正公)께서 간행(刊行)하시고 이제 계수(繼修)하는 일에 불초(不肖) 내가 각파(各派)의 자손(子孫)들과 다행(多幸)히 평화(平和)롭고 안락(安樂)한 때를 만나 의논(議論)을 같이 하여 계술(繼述)하였으니 이 뒤에 이어서 편수(編修)할 후예(後裔)가 실(實)로 어느때에 있을지 알지 못하나 오늘에 경신(庚申)을 이으듯 하면 어찌 우리 종족(宗族)들이 이 아름다운 일을 잊을 수 있겠는가.

 

憲宗十一 乙巳 1845年   月    日

헌종십일 을사 1845년   월    일

 

통훈대부행사헌부감찰 후손 익열은 삼가 서하노라

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 後孫 翼烈은 삼가 서하노라

 

 

을사대동보발(乙巳大同譜跋) 및 역문(譯.文) ( 1845年 )

을사대동보(乙巳大同譜) 발(跋)의 역문(譯文)

 

모든 일이 백세(百世)위에 시작(始作)하여 반드시 백세(百世) 아래까지 계승(繼承)됨이니 오직 우리 오대조(五代祖) 농포공(農圃公)이 오종(五宗)의 족보(族譜)없음을 민망히 여겨 기축년(己丑年 1709)에 처음 초고(草稿)하시고 종고조(從高祖) 사간공(司諫公)이 선인(先人)의 뜻을 계술(繼述)하여 무진년(戊辰年 1748)에 수정(修整)하여 다만 문성공파(文成公派)만 이 족보(族譜)를 한지라 지난 경신년(庚申年 1800)에 종증조(從曾祖) 도정공(都正公)과 선왕고(先王考) 지우공(之又公)께서 널리 수집(蒐集)하여 밀직공(密直公) 이하(以下) 제파(諸派)들과 수단(收單)을 합(合)하여 우리 하동정씨(河東鄭氏)의 대동보(大同譜)를 만드셨으니 농포공(農圃公)께서 정신(情神)을 쓰고 심려(心慮)를 많이 효과(效果)가 이에 빛이 나니 대대(代代)로 걸친 아름다움이 성(盛)하지 않은가.

경신(庚申)으로부터 지금(至今) 사십칠년에 제종(諸宗)의 장노(丈老)들이 다 별세(別世)하시고 남은 종인(宗人)도 경신년(庚申年) 후(後)에는 모두 늙었는지라 우리 종족(宗族)이 그 누가 다시 족보(族譜)를 계수(繼修)하려 하리오.

아! 합(合)하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합(合)함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불초(不肖) 내가 그 합(合)하고 산(散)함을 민망히 여겨 수년전부터 의론(議論)을 모으려 하나 미처 못하고 작년(昨年) 이월(二月)에 비로소 감찰(監察) 종숙(從叔)과 큰 계획(計劃)을 하고 여러 차례 통문(通文)을 발(發)하여 어렵게 합의(合議)하여 구보(舊譜)의 규모(規模)를 일체(一切)히 따라 간행(刊行)하였으나 이것을 금일(今日)의 새로운 족보(族譜)가 아니라 이것이 경신년(庚申年)의 구보(舊譜)이니 이제야 비로소 조상(祖上)님들의 많은 노공(勞功)을 알겠고 소동파(蘇東派)가 말한바「한 파(派)가 여러곳으로 흐

르고 백파(百派)가 한 근원(根源)이라」함을 이에 알 것같다.

단(但) 한(恨)스러운 것은 경렬공파(景烈公派)가 파보(派譜)를 먼저 하여 합보(合譜)하지 아니하니 어찌 개석(慨惜)치 않으랴. 이제로부터 이 뒤로는 무릇 우리 제종(諸宗)들은 서로 힘써 한 할아버지의 자손(子孫)이란 마음을 생각(生覺)하고 돈목(敦睦)하는 풍습(風習)을 잊어버리지 말고 일후(日後)에 족보(族譜)를 속수(續修)한 이가 이 규범(規範)을 따라 수간(修刊)하면 이 어찌 백세(百世)에 다행(多幸) 타 아니하랴.

 

헌종십이 병오  1846년   월   일

憲宗十二 丙午 1846年   月   日

 

후손 재승은 삼가 발하노라

後孫 在昇은 삼가 跋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