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세 호(鄭 世 虎)

 

효간공 휘 세호 묘소

공의  자(字)는 자인(子仁) 호(號)는 서계(西溪) 문성공(麟趾)의 5자인 찬성공(尙祖)의 둘째 아들이시다.

공은 1486년(성종 17년. 丙午)에 태어나셔서 1516년(중종 11년. 丙子)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19년(중종 14년. 己卯)에는 식년 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예조(禮曹), 병조(兵曹), 이조(吏曹) 3조의 좌랑(佐郞)과 , 지제교(知製敎)겸 세자우문학(世子右文學)을 지내시고 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 直提學) 응교(應敎)등에 승차하셨다.

 

그리고 부제학(副提學) 이조참판(吏曹參判)등을 지내시고 세자좌필선(世子左弼善)으로 계실 때 상(上)께서 특명으로 어전으로 들라 하여 통정(通政) 가선(嘉善)으로 승차시켜 동궁(東宮-세자)에게 치도(治道) 및 가언선행(嘉言善行)을 강론케 하였다.

효간공 휘 세호의 사당 효간사 전경

 

뒤에 전라, 경상, 평안, 함길 4도의 관찰사(觀察使-도지사)를 거쳐 다시 내직으로 이조(吏曹), 병조(兵曹), 공조(工曹), 형조(刑曹), 호조(戶曹) 5조 판서(判書)를 다 지내시고 중종(中宗)임금께서 승하(昇遐)하시면서 공에게 수릉관(守陵官)을 명하여 3년간 중종(中宗)임금님의 능(陵)을 모시고 조정(朝廷)에 돌아오니 명종 임금께서 공에게 수고했다고 논, 밭과 노비, 말(馬), 그리고 쌀과 비단을 특별히 하사하시었으며, 판중추지경연도총관(判中樞知經筵都摠管)으로 전배하셨다. 뒤에 또 판의금부시자(判義禁府知事)도 지내셨다.

 

효간공 종중 공원 묘원

그리고 공은 어머니 안씨(安氏)가 본래 인자하시어 일찍이 아들을 가르치면서 말씀하시기를 부귀영달(富貴榮達)은 구하지 아니하여도 가히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오직 옛 성인들의 역사와 법도를 잘 배운 사람이라야 되느리라 하셨다.

공은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을 천성으로 타고 나신 데다 어머님으로부터 어버이 모시는 지극한 정성을 배웠으므로 공이 16세때 아버님의 병환이 위중하심에 공은 주야로 촛불을 밝히고 하늘에 닿도록 통곡하며 기도하셨으나 차도가 없으니 공이 왼쪽 손가락을 짤라 피를 아버님 입에 넣어 드리니 효험을 얻어 열흘이나 더 살으시고 임종하심에 묘소의 옆에 초막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하시었다.

 

그 뒤에 어머님께서 병환을 얻으셔서 위중하심에 또 오른손가락을 자르셨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공을 보고 손가락이 없는 재상(宰相)이라고 하였다.

만년에 공이 병석에 눕게 되니 임금님께서 약과 의원을 보내 치료케 하였으며 또 관리를 여러 번 보내 병세를 물으시었다.

 

공은 임종이 가까웠을 때 아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며 나라에 은혜를 끝까지 갚을려고 하였으나 집안일 때문에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하시고 말을 마치셨다.

이리하여 공은 1547년(명종 2년 丁未) 11월25일 향년 62세로 별세하시니 임금님이 크게 슬퍼하시고 조정의 집무를 쉬게 하고 애도의 뜻을 표하도록 하셨으며 예관(禮官)과 조제관(弔祭官)을 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그 뒤에 선조 임금이 즉위하셔서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에 추증하시고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하셨으며 부조전을 내리셨다.

1762년(영조 38년. 壬午)에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는데

  자혜애친왈효(慈惠愛親曰孝)요. 평이부자왈간(平易不訾曰簡)이라 하시어 효간(孝簡)이라 내리셨다.

사당(祠堂)이 하사되지 않아 비만 건립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