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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숭 조(鄭 崇 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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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자(字)는 효숙(孝叔) 호(號)는 삼성재(三省齋)이시고 1442년(세종 24년. 壬戌)에 문성공(麟趾)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공은 1458년(세조 4년. 戊寅)에 벼술길에 올라 봉훈랑(奉訓郞)이 되시고 뒤에 이조(吏曹), 공조(工曹), 형조(刑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하셨다. 그리고 또 성종(成宗)대에는 순성명양 좌리공신(純誠明亮 佐理功臣)의 훈호를 받으시고 하남군(河南君)에 피봉 되셨다.
그 후 또 벼슬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총관(都摠管)과 두 번의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그리고 의금부 지사(義禁府知事)를 지내시고 다시 내직(內職)으로 입궐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셨으며 또 다시 외직으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 觀察使)와 경기도 순찰사(京畿道 巡察使)를 지냈지만 봉공(奉公)전후 40여년간 처음에서 끝까지 충성을 다하고 조금도 게을리 하시지 않아 가성(家聲)을 추락시키지 않으셨다.
연산조(燕山朝)에 들어와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차. 연세가 높아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로서 한가히 집에 계시면서 이재(理財)에는 전연 뜻을 두지 않으시고 오로지 군자의 문아(文雅)로서 거문고를 타시고 스스로 즐기며 날마다 손님을 맞아 대작(對酌)하시나 취한 적이 없으시고 가끔 경사(經史)와 부시(賦詩)를 의논하게 되면 그 언변(言辯)이 물 흐르듯 하고 호화롭게 부귀를 누렸으되 그 부귀(富貴)에 얽매이지 않했으니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시다.
1503년(연산군 9년 癸亥)2월 13일 향년 62세로 별세하시니 임금님이 크게 슬퍼하시고 2일간이나 조정이 쉬면서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 조문하고 예(禮)를 갖추어 장사지냈으며 1765년(영조 41년 己酉)에 나라에서 시호(諡號)를 내렸는데 履正志和曰莊「이정지화왈장」이요.
恭己鮮言曰靖「공기선언왈정」이라. 바르게 실천하고 뜻이 온화하여 「장」이요. 몸가짐이 공손하고 말이 고와 「정」이라 하였다. 그리고 부조묘에 봉사(奉祀)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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