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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인 지(鄭 麟 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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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정씨의 10世祖이시고 호(號)는 학역재(學易齋)이며 자(字)는 백휴(伯睢),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이고 조선조초기에 정치.문학에 활동하였으며 주요저서로는 학역재집(學易齋集)이 있다. 공께서는 1396년(태조 5년 丙子) 12월 28일 을묘時에 태어나시었다. 1411년(태종11)생원이 되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예빈주부(禮賓主簿), 사헌감찰(司憲監察), 예조좌랑을 거쳐, 1416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예조와 이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가 되고, 1424년(세종6) 직전예문응교(直殿藝文應敎)에 승진하였다. 1427년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 直提學 우필선(右弼善)이 되고 이듬해 부제학(副提學), 시강관(侍講官)을 겸하였다.
1430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고, 이듬해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지어 역법(曆法)을 개정하였으며, 1432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인수부윤(仁壽府尹), 이조참판(吏曹參判) 1435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다가, 1436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438년예문제학(藝文提學)으로 자치강목훈의(資治綱目訓議)을 저작하였으며 1440년 형조참판에 기용되어 이듬해 형조판서에 승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44년에 예문관대제학으로 <사륜전집(絲綸全集)>을 편찬하였다.
1445년 좌참찬 때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撰進) 하였다.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지방의 전품(田品)을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하였고, 뒤에 공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1452년(문종 2)병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때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을 도와 좌의정이 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1등에 책록,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다.
1455년(세조 1) 영의정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59년 공신연(功臣宴)에서 불서(佛書)간행을 반대하여 부여(扶餘)에 부처(付處)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다시 부원군이 되고 1465년 궤장(几杖)을 받았다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1469년(성종 즉위년)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이 되었다.
업적으로는 조선 초기의 유학자로 경서와 예학에 통하고 문장에도 능했다. 세종 때 안지(安止)와 함께 사대문서를 관장했다. 특히 사서(史書)편찬에 깊이 관여했는데, 조선 초기에 정립한 정사(正史)의 편제와 사관제도 정비에 많은 공을 세웠다.
1451년<고려사>의 최종 본을 편찬했고, 다음해에는 김종서와 함께 <고려사절요>를 편찬했다.<태조실록>부터<예종실록>까지 8대실록의 편찬에 직접 참여하거나 감수를 담당했으며,1455년에는<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했다. 훈민정음 창제에도 공이 컸으며, 권제(權踶), 안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뿐만 아니라 천문. 역산에도 밝았다.
세종 때 대소간의(大小簡儀)등 각종 천문기기와 누각(樓閣)제작 및 천문,역법 정비 사업을 관장했다. 또한 정초(鄭招)와 함께 <대통력 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을 편찬했으며, 아악 정비에도 참여했다.
그는 조선 국가체제의 원형이 된 세종~세조대의 수많은 제도개정과 예제정비에 참여했는데, 특히 세종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했던 공법(貢法)제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제조(提調)로서 직접 답험과 수조(收租)를 실험하여 공법의 수조율을 제정했으며, 공법 제정 후에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순행하여 이 지역의 전품(田品)을 책정했다. 세종 이후에 벌어진 제도개선 논의에서는 세종대의 제도를 고수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특히 문종 즉위 후 세종이 추진했던 왕실강화책을 비판하고 명문세가에 기반한 대신들의 입장을 강화하는 경향이 일어났는데, 이때도 그는 세종의 방침을 지지했다. <세종실록>을 지(志)체제로 편찬하도록 하고, 왕실 중심의 체제로 편찬된 세종의<오례의>를 훈구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종실록>에 기재하도록 했다.
그는 경연에 대해 왕이 대신의 의견을 듣는 자리라고 규정했는데 영의정이 경연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정치가 지나치게 권문세가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가 문종~단종 대에 정치적으로 위축됨에 세조에게 적극 협력한 것도 이러한 사상적 배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조대에도 문물제도 정비에 계속 관여했고 <경국대전>편찬에 참여했다. 저서로<학역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공이 1478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83세로 문성공의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 있으며 1980년 11월 13일 충청북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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