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택 뢰(鄭 澤 雷)

 

충결공 휘 택뢰 묘소

공의 자(字)는 휴길(休吉) 호(號)는 화강(花江. 華岡)이시고, 문성공(麟趾-인지)후 장정공(崇祖-숭조)의 손, 득열(得說)공의 아들이시다.

공은 1585년(선조 18년 乙酉)에 태어나셨다. 공이 8세때 아버지 충장공께서 사천현감으로 계셨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진주성(晋州城)싸움에서 스물여덟살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순직하시어, 충청도 부여 부여읍 능산에 모시었기 때문에 어머님 강씨를 따라 아버님 산소에 시묘(侍墓)살이를 갔었는데, 거기서 휴암(休庵) 정홍익(鄭弘翼)선생에게 글을 배웠으며 오랜 시묘살이에 지쳐 서울집에 오고 싶었지만 친구 장유(張維)와 같이 놀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부여(扶餘) 화기산(花技山)밑에다 집을 한칸 지어서 거기서 살게 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 壬子)에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공은 절조를 지켜 세속과 구차스럽게 화합하지 않는 지조가 있다고 친구들이나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있었다. 이때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무리 정조(鄭造), 윤인(尹訒), 이위경(李偉卿)등과 더불어 폐모(廢母) 논을 일으키고 이원익(李元翼)은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므로 장차 화가 어찌 될지 알지 못하였다.

 

공은 이에 격분하여 이이첨등을 논박(論駁)하고 폐모의 잘목을 극력 주장하였으므로 광해군이 대노(大怒)하여 공의 전가족을 남해(南海) 고도에 귀양을 보냈다. 어머님 강씨가 적소(謫所)에서 병을 얻어 고생하시므로, 공이 손가락을 짤라 피를 넣어 드리고 좋은 약을 구하여 간병하였으나 이듬해에 죽으매, 공이 애통함을 금치 못하다가 마침내 두눈이 실명되어 적소에서 죽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등극하여 공의 죄를 사하고 불렀으나 그때 이미 별세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사헌부지평으로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모시었다. 1695년(숙종 21년. 乙亥) 고을사람들이 소(疏)를 올려 부여(扶餘) 의열사(義烈祠)에 향사(享祀)하고 또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내리셨다. 그후 1806년(순조 丙寅)에 이조참의(吏曹參議)의 贈職과 1819년(순조 己卯)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의 증직과 충결공(忠潔公)의 시호(諡號)를 받다

 

의렬사 정문

부여군 부여읍

배향봉안 6위 :백제-성충, 홍수, 계백   고려-이춘오   조선-정택뢰, 황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