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응 두(鄭 應 斗)

 

동해공 휘 응두 묘소

공의  자(字)는 백추(佰樞) 호(號)는 동해(東海)이시며, 문성공(麟趾-인지)후 장정공의 증손. 증 승지 우(瑀)공의 셋째아들이시다.

공은 1567년(명종 22년. 丁卯)에 태어나셨으며 어려서부터 얼굴이 잘생기고 뜻과 행동이 고결하였다. 자라면서 시(詩)에도 능하시고 술도 잘드셨기 때문에 관리들과 선비들이 공을 흠모하고 같이 사귀기를 원하였다.

 

1590년(선조 23년. 庚寅)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604년(선조 37년. 甲辰)에 처음으로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어 건원릉(建元陵) 참봉과 내섬시주부를 지내시고, 1613년(광해군 5년. 癸丑)에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즉시 정 6품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배명받았는데 이때 이이첩(李爾瞻)이 국정을 쥐어잡고 조정을 문란케하여 반대파 사람들을 쫒아내고 자기네 당파 사람들을 끌어 들였다. 이첨이 사람을 보내 같이 일하기를 권하였으나, 조정은 어지럽고, 모든 관리들이 이첨의 집에 들락거리며 이첨은 공납금을 긁어 모아 부정을 하고, 붕당을 조성함으로, 공은 정의(正義)를 지켜 이첨에게 붙지 않으니 이첨의 무리들이 공을 미워하므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니 공은 호조좌랑에서 무장(茂長)의 현감으로 쫓겨나게 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호조 정랑으로서 관서(官署)의 검찰사(檢察使)로 일하라고 하여 공은 몸이 아프다고 사양하고 호서(湖西)로 돌아가 술이나 마시고 시(詩)나 읊으시면서 유유자적하며 지내시니 조정에 재상들이 공이 고향에서 그냥 늙는 것을 안타깝게여겨 비변사(備邊司)에 여러번 천거하니 이첨의 아들 대엽(大燁)이 공을 크게 기용함이 옳다고 함으로, 그때 전조와 삼사에서는 공을 다시 기용함을 두렵게 여겼다.

 

그래서 공은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중국(명나라) 사신으로 기용되어, 명나라에 가는 진향사(進香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正史) 유간(柳澗)과 부사(副使) 화산군(花山君) 강욱(康煜)을 모시고 명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 명나라와 청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어 가는 길목의 요동이 청나라에게 함락되어 종일(終日) 결전을 하고 있었으므로 아주 위험하였다.

 

그래서 서로 안타까워하고 거기에 머물고자하므로 공이 정사에게 말씀드리기를“신하로서 어렵다고 피하는 것은 옳은일이 아니다”고 하시면서 요동을 건너가기를 고집하여, 계속가는데 3일만에 요동이 완전 함락되어 사신들이 다시 돌아오게 돼서, 배를 천진(天津)으로 돌려 등주(登州)의 묘도(廟島)에 이르렀을때 화산군이 병으로 돌아가시니 유간이 그 시체를 버리고 갈려고 함으로 “더럽다고 버리고 가면 되겠느냐”하고 공이 친히 염을 해가지고 배에 실으려고 하니 유간이 꼭 배를 띄울려고 하여, 공이 배를 띄우지 말 것을 고집하였으나, 유간이 공의 말을 듣지 않고 돗대를 들어 항해를 시작 하였으므로 부득이 따라 나섰으나, 가다가 큰 바람을 만나 배가 기울고 돗대가 부러졌다.

 

그래서 공이 부셔진 배를 끌고 표류하다가 철산도(鐵山島)로 건너가려고 하였으나 바람이 그치지 않아 배가 돌에 부딪치게 되어 배가 완전히 부서져 배속에 있던 사람들이 다 빠져죽고 공이 홀로 서동생(庶同生) 응항(應亢)과 통역 응원(應元)등과 같이 갑판에 걸터앉아 이미 다 부서진 갑판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추워서 얼고 굶주리고 하여 구제된 사람은 하나도 없이 이날 다같이 죽었다.

 

유간은 먼저 죽어 바다 가운데에 시체가 있어 유간의 시체는 인양하지 못했다. 이때가 1621년(광해 13년. 辛酉) 9월 10일 이었다.

명(明)나라 주(州)에서 이 소문을 듣고 황제께 아뢰어 명나라 황제가 치제관을 보내 관을 준비하여 시신을 잘 지키도록 하였으며 곧 우리나라 조정에서도 이소식을 듣고 임금님께서 치제관을 보내 고국으로 모셔왔다. 뒤에 조정에서 공을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