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광 적(鄭 光 績)

 

익정공 증 의정부 우의정 휘 광적의 묘소

공의 자(字)는 경훈(景勛) 호(號)는 남파(南坡) 또는 서간(西間)이시며 문성공(麟趾)후, 장정공(崇祖)의 증손 찬성공(起門)의 둘째 아들이시다.

공은 1550년(명종 5년. 庚戌)에 태어나셨다.

 

1567년(명종 22년. 丁卯)에 사마시 진사과(司馬試進士科)에 급제하고 1579년(선조12년. 己卯)에는 식년 문과 전시(式年文科殿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셔서 곧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에 제수 되고 이어 예문관(藝文館)의 검열(檢閱)에 전배 되었으며 뒤에 승정원(承政院)의 주서(注書) 예문관(藝文館-규장각)의 대교(待敎)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병조좌랑(兵曹佐郞)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등을 역임하시고, 공은 본래 성품이 강직하셔서 늘 자기 주관을 굽힐 줄 모르고 권세와 부휘도 정당하면 피하지는 않았으며 남이 꺼려하는 길도 공은 가리지 않고 나아갔다.

 

그리하여 해주판관(海州判官)으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그후 다시 사헌부 지평(持平)을 배명 받고 내직으로 들어와 사간원(司諫院)의 헌납(獻納)에 전보되었을 때 특명으로 순무사(巡撫使)가 되어 영남의 연해(沿海)수군을 둘러보시고, 또 이어서 호남의 선비들을 교유(敎諭)하여 진무(鎭撫)하러 가라는 왕의 특명을 받고 호남에 가서 종래의 누습(陋習)을 타파하고 사풍(士風)을 쇄신하는데 정성을 다하시고 지평(持平)으로 다시 조정으로 소환되어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제수 되었으며 또 지제교(知製敎)로 전보되셨다.

 

1592년(선조 25년. 壬辰)에 암행어사로 관동 지방에 갔을 때 왜구(倭寇)가 창궐(猖獗)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님이 관서 지방으로 피난을 가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험한 길을 죽음을 무릅쓰고 평양 행재소(平壤 行在所)로 달려가 복명(復命)을 하니 임금님께서 전란 속에 찾아온 것이 가상하여 바로 사헌부의 집의(執義)로 승진시켰다가 다시 종 3품 집의에서 정 3품 당하관인 장낙원(掌樂院)의 정(正)으로 교체 발령하셨다.

파주 밥재 판서동 3부자분 신도비 전경
증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휘 기문
행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휘 희적
행 예조 형조 판서 증 우의정 휘 광적

 

이때 전란은 지속되고 해서 지방의 군인들이 군량(軍糧)이 떨어져 어려움을 격고 있으므로 공이 조도 어사(調度御史)로 내려가 조변(調辨)하였으므로 임금님께서 정청(政廳)에다 훈공을 봉하는 책명을 내리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정광적(鄭光績)은 군량을 잘 조달한 공이 크므로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승진시킴이 옳다”고 하시었으나 전조(銓曹)에서 자급(資級)을 정하지 못함으로 특명으로 승진시켰다.

 

1494년 (선조 27년. 甲午)임징왜란이 중반으로 접어들었을 때 원병으로온 명(明)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수행하고 성주(星州)에 갔었으며 또 명나라 장수 동일원(董一元)을 수행하고 남쪽으로 왜적을 쳐 내려갈 때 동일원이 교만 방자하고 능폭(凌暴)하였으나 공이 나라의 처지를 생각하여 수치스럼을 참고 거짓 응대하여 모든 일에 불편없이 주선해 주니 명나라 장수들도 공에게 경복(敬服)하였으며 결국 동일원이 우리 나라 조정에다 정광적(鄭光績)은 아주 충근공직(忠勤供職)하는데도 직위가 낮으니 마땅히 승지을 시켜야 된다고 권하여, 1595년(선조 28년. 乙未)에 병조참지(兵曹參知)에 발탁되었으며 뒤에 황해(黃海). 강원(江原) 양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내시고, 다시 내직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제수 되셨다가 이어서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승진하셨는데 이때 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명(明)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가 원병 제독으로 나와 전남 곡성(谷城)에 있는 적을 요격(邀擊)하고자 하여 호조(戶曹). 병조(兵曹). 공조(工曹) 3조의 장관들에게 급히 병사들을 이끌고 함께 내려가기를 청함으로 공이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과 공조판서 김명원(金命元) 그리고 접반사(接伴使) 장운익(張雲翼)등과 같이 내려가 충남 직산(稷山)이남을 새로 나누어 군사를 배치하고 병사들의 물자와 식량이 공급된 것이 없어, 공이 서울에 있는 양곡 창고를 열어 군량미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해 전군에 령을 내려 각자 5일간씩만 먹을 식량을 가지도록 하고 일과가 없는 병사들을 모아 각 고을에 돌아다니며 먹고 남은 식량이 있으면 얻어다가 군량미로 공급하도록 하여 병사들을 구제하였다.

 

그리고 조정으로 돌아와 홍문관(弘文館)의 부제학(副提學)을 배명 받으셨다. 그런데 이때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있던 구의강(具義剛)이라고 하는 사람이 갑오년에 명나라 장수들에게 잘해 준 일을 거론하여 공을 쳐서 논박함으로 유성용(柳成龍)과 김우옹(金宇옹)이 소(疏)를 올려 공을 도와 화해를 시켰다. 이리하여 공은 사직할려고 하였으나 다시 병조참판(兵曹參判)을 배명 받고, 또 광해군 즉위 초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다시 부제학(副提學)에 제수 되어 개선할 제도 열가지를 아뢰었는데 그중에 한가지가 임금님의 어머님에 대한 복(服)입는 제도를 아뢰면서 “성효(誠孝)를 다하여 받들어야 된다고” 조금 심한 언사로 아뢰었으나 광해군 또한 “그것은 죄가 아니다”하시며 너그럽게 이해를 하였다.

 

1609년(광해 1년. 己酉)에 이이첨(李爾瞻)등이 임해군(臨海君)을 죽이는 옥사를 일으켜 공이 홍문관에 있을 때 임해군을 보도(輔導)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공이 임해군에게 특별히 은총을 받았다 하여 그것을 논박(論駁)함으로 공은 오로지 임해군에게 덕을 베풀어 잘 모신 것인데 그것을 중상 모략함은 마땅치 않았으나 참았다.

 

이첨이 말하기를 “양사(兩司)에서 청한 법을 홍문관에서 그 대의(大義)를 밝히지 않고 묵살시켰다”고 몰아세워 결국 공을 탄핵하였으므로 공은 사직하고 파산(坡山)으로 돌아가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기로 하였다. 뒤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과 의금부 총관(義禁府摠管)을 제수 하였으나 다 나아가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 뒤 또 명(明)나라 사신이 다시 와서 공을 정위사(廷尉使)로 불러 부득이 황해도 황주에 갔다가 또 그만두고 다시 파산(坡山)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또 1613년(광해 5년. 癸丑)에 다시 담양부사(潭陽府使)로 발령이나 공은 이미 내직을 사양한 일이 있어 또 외직도 피하면 조정에 불만이 있다고 할까 봐서 어쩔 수 없이 부임하여 청렴 정직하게 백성을 다스리는데 힘쓰니 백성이 저절로 다 교화(敎化)되어 잘 복종 하였다.

 

그때에 극심한 가뭄을 만나 백성들이 몹시 애타게 비를 기다리므로 공이 지성으로 기도하여 담양에만 비가 내려 대풍(大豊)이 든 일이 있었다. 이때 흉당(凶黨) 이이첨(李爾瞻)등이 대궐 안뜰에다 기우제를 모신다고 단을 쌓아 놓고 모후(母后)를 폐하자는 청(請)을 광해군에게 드려 백관(白官)을 저울질 해보았다. 그때 뜰에 불참한 사람은 죄를 주기로 함으로 공은 상경하여 사직(辭職)하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가 서울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고 산 좋고 물 좋은 경치를 찾아다니시면서 시골 노인들과 유유자적(悠悠自適)하시며 즐겁게 지내셨다.

 

그 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출되고 1623년 3월 인조(仁祖)가 등극함으로 바로 이이첨등 흉당의 무리들이 다 제거되니 공은 다시 조정에 불리어 나가 대사간(大司諫)을 지내시고 이어 우참찬(右參贊)과 대사헌(大司憲)을 제수 하였으나, 소(疏)를 올려 극구 사양하니 상께서 가납하셨다.

 

1624년(인조 2년. 甲子)에는 이괄(李适)이 인조 반정 때의 논공 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관북 지방(關北地方)에서 난을 일으켜 그 기세가 대단하여 서울을 점령하였으므로 임금님(인조대왕)께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실 때 공이 어가(御駕)를 호위하고 공주(公州)에 이르니 난(亂)이 평정되어 뒤에 조정에서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책록하고 정 2품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차시켰으나 공은 소(疏)를 올려 치사(致仕)할려고 하였지만 상(上-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공이 이 직(職)을 그만두면 자주 만나 볼 수가 없으니 종전의 직명 그대로 있으라”고 하시어 부득이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1627년(인조 5년. 丁卯)에 정묘호(노)란(丁卯胡(虜)亂)이 일어나 임금님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시게 됨으로 공이 임금님에게 아뢰어 공은 또 자전과 중전을 모시고 피난을 가시면서 강화도 수비가 매우 허술함을 상께 아뢰어 전쟁을 대비하여 수비를 강화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1636년(인조 14년. 丙子)에 공은 또 죽은 처의 묘소를 이장(移葬)하기 위하여 물러갈 것을 아뢰니 상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를 보라”하시고 “선왕을 모셔 오던 늙은 중신들을 내보내지 않고 종정(鐘鼎) 기구(耆龜-고문)와 같이 기로소(耆老所)에 들게하여 서로 떨어지지 않고자 함이 나의 지극한 뜻인데”하시며 어쩔수 없다는 듯이 윤허하시면서 “이장하는 일은 자손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힘든 일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병자호(노)란(丙子胡(虜)亂)이 또 일어나 임금님이 서울에서 노부(鹵簿)를 차릴 겨를도 없이 창황(蒼黃)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가실 때 공은 원손(元孫)을 모시고 강화도(江華島)의 서북쪽에 있는 교동도(喬桐島)로 피난하셨다. 그런데 적군이 그곳까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로 옮겨 그곳을 수비하는 제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적군을 막도록 지시를 하였으나 제장들이나 병사들이 서로 미루고 나아가기를 두려워함으로, 공은 충분격개(忠憤激慨)하여 그곳의 실정을 상세하게 적어서 보내니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다 감읍(感泣)하였으며 결국 상께서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통곡하며 2백년 예의지국(二百年 禮儀之國)이 말갈(靺鞨) 놈들에게 다 망했으니 장차 어느 곳에다 청나라 조정을 둘 것인가 하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혼절하여 땅바닥에 넘어지셨다. 이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부축하여 겨우 소생하였으나 그때 공의 나이 88세인데도 밤낮으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라의 장래를 근심하시어 슬피울으시다가 결국 병을 얻으셨다.

 

이때 적군이 교동도를 지나 평북 철산(鐵山)에 있는 가도(가島)로 빠져나감으로 원손이 적을 물러감을 알고 자기 스스로 교동도의 포구로 나가신지라 공은 병환이 위중하여 들것에 들려 배에 올라 원손을 호위하고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 안흥만(安興灣)의 성(城)밖에 이르러 임종(臨終)하시면서 탄식하시기를, “나는 이제 늙어서 죽어도 한이 없는데 다만 국치(國?)를 씻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슬프도다”하시었다.

이때가 1637년(인조 15년. 丁丑) 2월 19일이었다.

 

* 후에 임진 원종 공신(壬辰 原從 功臣)으로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시고 1765년(영조 41년. 乙酉)에 시호(諡號)를 익정(翼正)이라 내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