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공 영정
공의 휘(諱)는 인지(麟趾) 자(字)는 백휴(伯睢) 호(號)는 학역재(學易齋)이시고, 문충공(芝衍-지연)의 현손이시며 하성부원군(興仁-흥인)의 아들이시다.
공은 1396년(조선조 태조5년. 丙子) 12월 28일(戊戌) 을묘시(乙卯時)에 태어나셨으며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일찍이 문예(文藝)도 성취하셨지만 용모(容貌)또한 옥(玉)같이 아름답고 의표(儀表)도 단정하였다.
공은 늘 바깥 사랑채에서 밤늦도록 글을 읽었는데 그때에 공의 집과 담장을 사이에 둔 옆집에 아주 예쁘고 탐스러우며 거문고도 잘 타고 집안 또한 훌륭한 낭자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낭자가 공의 글 읽는 소리가 아주 낭랑함을 듣고 몰래 문틈으로 공의 미모(美貌)를 보고 마음속으로 사모하다가 연정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날 밤 담장을 넘어와 공을 가까이 하고자 하였다.
이때 공이 정색(正色)을 하며 이를 거절하니 낭자는 소리를 질러 이 사실을 밖에 알리려고 하였다. 이에 공은 거절하기 어렵게 됨을 알고, 설득하기를 내일 아침에 어머님께 말씀드려 결혼을 하도록 해 보겠다고 하면서 지금 만약 한때에 일어나는 연정을 이기지 못하고 만다면 낭자는 부녀자의 정절을 잃게 되고 또 나도 마음이 불쾌한지라 아직은 때가 아니니 참고 때를 기다려 양가(兩家)가 서로 의논해서 혼례를 치루도록 함이 좋겠다고 하니 낭자는 매우 기뻐하며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공이 그 다음날 어머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리고 다른 집으로 옮겨 살기를 청하니 어머님께서 마침내는 그 집을 팔고 그 낭자와 약속을 끊었다. 이렇게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셨음을 알 수 있다.
공은 조선 초기(初期)의 대학자 매헌(梅軒). 권우(權遇)선생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셨는데 일곱 살에 소학(小學)을 다 읽어 통달하고 열세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여러 가지 책을 강론하니 모든 선비들이 경탄(驚歎)하고 경복(驚服)하였다.
1411년(태종 11년. 辛卯) 공의 나이 열 여섯살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시고 6년간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실 때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고 계속 열심히 공부하여 크게 발전하였는데 그 때 육조(六曹)와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그리고 명륜당(明倫堂)의 유생(儒生)들이 모두 모여 도학(道學)을 일으켜 보려고 계책을 세울 때 개중에는 불가(不可)하다고 흉보는 사람이 있어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공이 글을 지어 후원하니 모든 유생들이 크게 칭송하셨으므로 이 소문을 방촌(尨村) 황희(黃喜)정승께서 들으시고 성균관에 오셔서 공이 지어 논 글을 보시고는 탄복하여 칭찬하시기를 “ 그 글의 내용이 극진하여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겠다.”고 하셨으며 또 대제학(大提學)으로 계시던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공이 그 문장을 보고 말(言語)이나 얼굴 등 모두가 준수(俊秀)하여 미치지 않은바가 없다고 극찬하셨다.
1414년(태종 14년. 甲午) 성균관에서 공부하실 때 약관 십구세의 나이에 식년 문과(式年文科) 을과(乙科)에 장원 급제하니 태종 대왕이 특별히 공을 불러 보시고 이름은 진작에 들었으나 얼굴을 알지 못하였다 하시며 머리를 들라 하시어 공이 머리를 들어 우러러뵈오니 공의 얼굴을 자세히 보시고 상(上)께서 아주 다정하게 “다들 좋은 때라”고 하시며 칭찬하셨다.
그래서 공은 태종 대왕의 지우(知遇)를 받았다. 그 뒤에 예빈시(禮賓寺)의 주부(主簿)와 사헌부(司憲府)의 감찰(監察)등을 지내시고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신 후 태종(太宗)이 전위(傳位)하시고 세종(世宗)이 즉위(卽位)하시자 1419년(세종 1년) 어느날 세종 임금을 모시는데 세종 대왕께서 나라의 군사(軍事)를 총괄하는 중대사를 공이 좀 맡으라고 하시였으며 곧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전임되었다. 그리고 그전에 태종 대왕께서 왕위에 계실 때 세종에게 말씀하시기를“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문무장재(文武長才)를 얻어야 된다”고 하셨는데 세종 대왕께서 “ 나는 이제 문(文)에는 정인지(鄭麟趾)를 무(武)에는 홍사석(洪師錫)이 있으니 이 사람들이 다 재상(宰相)과 장군(將軍)이 되면 재상은 안을 다스리고 장군은 밖을 다스리면 나는 근심이 없을 것이다” 하셨다.
그래서 공은 문재(文才)로 세종의 총애를 받아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집현전 학사(集賢殿 學士)로 등용되고 또 집현전 응교(集賢殿 應敎)에 이어 1425년(세종 7년)에는 집현전 직제학(集賢殿 直提學)에 승차하셨으며 1427년(세종 9년. 丁未)에 문과중시(文科重試) 을과에 장원급제하니 상(上)께서 문학(文學) 최만리(崔萬理)와 같이 밤에 입시(入侍)케 하여 “세자(世子)에게 치도(治道)를 강론하라” 하시고 “선정(善政)을 할 수 있는 좋은 말과 백성들의 안락과 근심 걱정을 말해 주고 저녁에는 평상시와 같이 마치도록 하라”하시며 좌필선(左弼善)을 제수하셨다. 이때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등과 같이 훈민정음 창제하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그해에 어머님 상을 당하시매 너무 슬퍼 하셔서 피골이 상접하였으나 3년 동안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3년상을 마쳤다.
그 뒤 세종 임금께서 경연(經筵)에 나와 학문을 강론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시어 공이 사양하시었으나 상(上)께서 공을 집현전 부제학(集賢殿 副提學)과 지제교(知製敎) 및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을 제수하셨다. 1430년(세종 12년)에는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셨으며 그 이듬해에는 대제학(大提學) 문경공(招-초)과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지어 역법(曆法)을 개정하였으며 1432년(세종 14년)에는 예문관제학과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지내셨다.
그리고 또 인수부윤(仁壽府尹)과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내시고 늙은 아버님을 모시기 위하여 임금님을 알현(謁見)하고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상(上)께서 허락지 않으시고 부친이 계신 충청도의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겸 감창안집전수권농관제조(監倉安集轉輸勸農管提調) 형옥병마사(刑獄兵馬使)를 제수하시고 세급(歲給)을 전하였다. 이때 공은 수레를 타고 고향으로 떠나시려고 하다가 수레에서 내려 임금님께 머리를 조아리고 옛 성인들은 폐지된 법도 좋은 풍속 같으면 잘 다듬어 정사(政事)에 크게 쓰도록 했다고 하시고 작별을 아쉬워하며 떠나셨다.
몇 년 후 1436년(세종 18년) 부친상을 당하여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복을 마치고 다시 조정에 나아가 예문관 춘추관의 제학(提學)을 지내시고 또 세자빈객(世子賓客)과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을 지내실 때 세종 대왕께서 형옥(刑獄)을 중요시하셨는데 그때 형조판서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어 법령을 범하는 백성들이 많아 다수의 백성들이 조정을 원망하므로 1439(세종 21년) 공이 형조 참판으로 등용되셨다가 곧이어 형조판서로 배명(拜命)하였다.
1441년(세종 23년 辛酉)에는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가셨을 때 중국의 예악 문물이 동쪽이 성(盛)함을 보시고 돌아오시면서 수행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중국은 사람들이 다 크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진 곳이다”고 하셨다.
1442년(세종 24년)에는 예문관 대제학으로 계시면서 임금님의 명을 받아 사륜요집(絲綸要集)을 찬진(撰進)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가 설치되자 제조(提調)를 지내시고 1445년(세종 27년) 의정부(議政府)의 우참찬(右參贊)으로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하였다.
그리고 예조판서를 거쳐 1448년(세종 30년) 이조판서 겸 성균관대사성을 지내실 때 삼남 지방의 전품(田品)을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했고 그후 세종의 고명(顧命)으로 공조판서(工曹判書)와 좌참찬(左參贊)을 지내시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전임(轉任)되어 일찍이 당상관으로 계실 때 가지고 있던 수십권의 관리들의 문부(文簿)중 지난 당하관들을 불러 보신 후 또 각도(各道) 군사(軍士)들의 여러 해 미결된 신상명부도 다 살펴보시고 그 미결된 문부를 관리들에게 명하여 다시 분류해서 매 가지고 각도 감사들을 독령(督令). 관내 수령(守令)들에게 나누어주어서 각자 가려서 시행토록 하니 오래 누적된 기무(機務)가 불과 몇 마디의 공의 지시 말씀으로 하루 아침에 다 해결된 지라 사람들이 공의 지혜와 능력에 탄복하였다.
세조(世祖)가 잠저(潛邸)에 계실 때 공이 정직함을 알고 아들의 혼인을 약속하고, 1453년(단종 1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때 수양 대군을 도와 좌의정(左議政)과 영집현전경연사(領集賢殿經筵事)가 되셨으며 또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1등으로 하동 부원군(河東 府院君)에 봉해졌다.
1455년(세조 1년. 乙亥) 윤 6월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공은 영의정겸세자사(領議政兼世子師)를 배명(拜命)하였으며 또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 2등호를 더하였다. 그러나 세조 4년 공신연회(功臣宴會)에서 유불시비(儒佛是非)를 논하여 왕의 뜻을 거슬려 모은 직위(職位)를 박탈당하고 부여(扶餘)에 부처(付處)가 되었다가 몇 달뒤 풀려나와 다시 부원군이 되었으며 1465년(세조 11년) 공의 춘추(春秋)가 70세가 되시어 관직을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으며 1469년(예종 즉위년)에는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功)으로 정난익대공신(定難翊戴功臣) 3등이 되었으나 뒤에 크게 원망하였다.
예종(睿宗)이 승하(昇遐)하시고 성종(成宗)이 임금의 자리를 잇게 되자 원상(院相)으로써 어린 임금을 잘 보필하여 서정(庶政)을 총괄하였고 1471년(성종2년 辛卯)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의 녹을 더하고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2등(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二等)이 되셨다.
공은 천성이 영매하고, 도량이 넓고 맑은 하늘같이 깨끗하며 평생 나쁜 말이나 성내어 얼굴빛을 붉히지 않으며 성품 또한 검약하여 의복과 음식 그리고 대궐에 등청(登廳)하실 때 교자(轎子)등도 폄범하게 하시고 대궐에서도 너무 지나치게 치례하는 일은 하지 않으셨으며 집에 계실 때도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시고 머리 빗고 백가제서(百家諸書)를 손수
다 풀어 통달하시었으며 특히 역학(易學)을 연구하는데 정진하셨으므로 호(號)를 학역재(學易齋)라 하셨다.
그리고 천문(天文), 지리(地理), 율역(律曆)과 점술까지도 다 정통하였으므로, 세종 대왕께서 공에게 밤에 하늘의 기상(氣象)을 관찰하라고 하시면서 이슬과 서리를 맞는다고 어의(御衣)를 내리시고 또 예악(禮樂)을 다 찬정(撰定)하라고 거듭 명하여 맡기시므로 공이 사적(史籍)을 널리 살펴 나쁜 법규는 버리고 좋은 범만 가려 책을 찬 하였으며 또 목조(穆祖)에서부터 개국의 기초(太宗까지 六代)까지의 사적(事蹟) 즉 이름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총 125장(章)을 임금(世宗大王)께서 친히 국문(國文)으로 지어 놓은신 것을 공이 28자 모음을
초(初), 중(中), 종(終) 성(聲)으로 나누어 전환(轉換)이 무궁하도록 하고 진(秦)나라와 한(漢)나라로부터 명(明)나라 황실에 이르기까지 성명순(姓名順)으로 분별하기 좋게 고쳐서 편집을 마쳤으며 또 아울러 사륜전집(絲綸全集)을 찬 하셨다.
공이 공조판서로 계실 때(1450년 세종 32년)
1월에 명(明)나라의 사신(使臣) 시강(侍講) 예겸(倪謙)이 명나라 경종의 즉위를 알리려고 우리나라에 오므로 공이 원접사로 의주에가서 영접하시고 또 관반사(館伴使)로 임명되어 예겸과 같이 정사(政事)와 학문을 논(論)하셨는데, 이때 예겸은 공의 높은 학문과 경륜에 경복(驚服)하여 공을 칭송하기를“공조(工曺)는 조정의 종(鍾)이라”고 칭탄하였으며 또 뜰에 앉아 하늘을 우러러보고 예겸이 공에게 묻기를“해와 달은 어느 별자리 다음에 있느냐”고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해와 달은 28수의 하나인 정(井)의 별자리 정동(正東)에 나누어 있다”고 하니 예겸이 공의 박식(博識)함에 탄복하여 크게 칭찬하고 천상(天象)을 논(論)하기를 그칠 줄 모르더니 드디어 도학(道學)을 논(論)함에 있어서도 향응(響應)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예겸은 앞으로 공과 잘 지내보기를 원하였다.
성종 대왕의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의 장례시에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 노를 저을 수 없어 관을 낙천정(樂天亭)에다 편안히 모셔 놓고 영의정 하연(河演)등이 모여서 편히 모시는 방안을 의논하는데 관(棺)의 머리를 남쪽으로 할 것인가 북쪽으로 할 것인가 하고 의논이 분분하여 결정이 되지 않으므로 공이 말씀하시기를“빈궁에 있을 때는 살아있을 때와 같이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되고 현궁(玄宮)에 모실 때는 유택(幽宅)인고로 머리를 북쪽으로 모셔야 된다고 하시고 또 풀어서 말씀하시기를 죽은 사람을 산사람같이 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 불가하고, 또 산사람을 죽은 사람같이 하는 것도 어질지 못함이라, 참아 할짓이 아니니 이또한 빈궁이므로 의당 남쪽으로 머리를 모셔야 된다”고 하시니 여러 사람들이 다 탄복하였다.
공은 또 평소에 집에 계실 떄도 집을 지키는 무사(武士)들이 오면 뛰어 나아가 성심(誠心)으로 맞이하시고, 늘 무사들이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면서 집을 지키고 호위하느라고, 몸이 극히 초췌하게 고생을 한 덕택으로 변변치 못한 재주로 시문(詩文)이나 초하고 편히 쉴수 있는 것과, 집에 쓰는 비용을 국고(國庫)에서 주는 것을 아주 부끄럽게 생각 하셨다.
그리고 집에서 쉬시는 날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낙을 삼아 게으름을 잊으시고 또 글을 가르치시다가 주로 어른을 공경하는 글귀와 순수한 말에 이르면 반복하여 가르치고, 제자들을 모아 놓고 몸소 계율을 가르치셨는데, “요(堯)임금의 덕(德)은 윤공극양(允恭克讓)이라 하시고 순(舜)임금의 덕(德)은 온공윤색(溫恭允塞)이라 하시며 휘유의공(諱柔懿恭)은 문왕(文王)의 덕목(德目)이며, 온량공검(溫良恭儉)은 공자(孔子)님의 덕목이라”하시고 “옛날 성인들이 살아오신 것을 보면 이렇게 덕을 숭상하고, 또 공경하였으니, 그 아래 사람들이 어찌 감히 어른들을 무시할 수 있었겠는가.
하시고 지금 사람들을 보면 편히만 살려고 하여 남을 무시하는 기운이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느냐”하셨다.
그리고 공은 스스로 상장가례(喪葬家禮)등을 지어 “제사 모실 때 쓰는 제물은 소채로 검소하게 하고 옷을 해 입을 때도 금(金)이나 옥(玉), 보배, 구술 같은 것을 달지 말 것이며 절약하는데 힘쓰고 또 더욱 경계할 것은 신불(神佛)을 믿지 말라”고 하시며 말씀하시기를“죽음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살아가는데도 해로움이 있다”고 하셨다. 공은 이렇게 일생을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살으시다가 어느 날 밤 담소(談笑)도 하시고 태연자약 하시더니 갑자기 정신이 흐려지시면서 병환이 위중하시어 그 길로 회복치 못하시고 향년 83세로 1478년(성종 9년 戊戌)11월25일에 별세하시니 임금님께서 크게 슬퍼하시고 3일간을 철조(輟朝)하였으며 특별히 쌀과 콩 그리고 비단과 마포를 부조로 내리시면서 벼슬의 품계를 더 높여 주시고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토록 하였으며 시호(諡號)를 문성(文成-도덕박문왈문(道德博聞曰文)이요. 좌상극종왈성(左相克從曰成)이라 내리시고 또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내리셨다. 후일 영조(英祖)대왕은 친히 글을 지어 신하를 보내 치제케 하기도 하였다.
공의 저서(著書)로는 김종서와 같이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셨고 권제(權蹄), 안지(安止)등과 같이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며 공은 학문이 해박하여 모든 일에 거칠 것이 없었고 세종의 천문역산(天文曆算)의 뜻을 받아 대소간의 규표(大小簡儀 圭表) 및 흠경보루(欽敬報漏)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자치통감 훈의(資治通鑑 訓義)와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 학역재집(學易齋集),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협찬, 역대역법(歷代曆法)등이 있다.
공은 조선 초기의 대학자이시며 위대(偉大)한 정치가(政治家)이셨다. 그리고 세종실록과 문종 실록을 편찬하셨다.
공의 행장(行狀)은 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이 찬하고 신도비문(神道碑文)은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이 찬 하였으며 묘지(墓誌)는 양성군(陽城君) 이승소(李承召)가 찬하고 대제학 정난종(鄭蘭宗)이 썼다.
1504년(연산군 10년. 甲子)에 폐비 윤씨(尹氏)가 죽게 되었을 때 공이 원임 대신으로서 폐비를 구하지 않았다고 하여 공의 비를 넘어뜨리는 화를 당하여 선조(宣祖)때 다시 비를 건립하였음이 음기(陰記)에 기록되어 있음.
공의 묘소(墓所)는 괴산군(槐山郡)
불정면(佛頂面) 외령리(外嶺里), 밭능(外陵) 인좌(寅坐)에 모셨음.
공의 벌열(閥閱)
상신(相臣) : 세조조 영의정
공신(功臣) : 단종조, 계유 정난 1 등 공신
세조조, 세조 즉위 2 등 공신
예종조, 남이 옥사 3 등 공신
성종조, 성종 즉위 2 등 공신
호당선(湖當選) 성종조
문 형(文 衡) 세종조
기 사(耆社-耆孝所) 세조조
궤 장(几 杖) 세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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