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공 후 찬문(燦文)
-18세손, 충북대학교 교수-
1. 출생의 배경
문성공
정인지(鄭麟趾) 선생은 조선시대 1396년(태조 5년) 12월28일
을묘시에 태어났다. 부친 흥인(興仁)은 내직별감(內直別監)이었고
모친 흥덕진씨(興德陳氏)는 중랑장(中郞將) 진천의(陳千義)의
따님이었다. 공(公)이 탄신(誕辰)하기까지 부친은 소격전에
나가 "가문을 일으킬 훌륭한 아들을 하나 달라"고
지성으로 소원했는데 마침 진씨가 잉태하였으니 그 상서로움이
누대로 남을 만한 일이다.
공은
5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쳐 한번만 보면 읽고 쓸 줄 알아
천재라고 소문났으며 모친 진씨는 자식 잘되기를 소원하여
소학(小學)을 가례(家禮)의 귀감으로 삼아 엄격하게 훈육하였다.
이같은 부모님의 정성과 덕업(德業)에 감명을 받았던 공은
평생동안 소학을 베게 밑에 놓고 자면서 논행(論行)이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효행(孝行)을 만행의 근본으로 삼았다.
1408년(태종
8년) 13세 때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당대 대유학으로
소문난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스스로 자(字)를
백휴(伯휴)라 하여 맏아들로서 눈을 부릅떠 세상을 올바르게
보겠다는 뜻을 가졌고 호(號)를 학역재(學易齋)라 하여
주역(周易)의 이치를 깨달아 세상을 밝히겠다는 뜻을 세웠다.
2.
태종·세종·문종대의 관력(官歷)과 업적
1411년(태종
11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3년째인 16세 때 100명을 뽑는
생원시(生員試)에 장원(壯元)하여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1414년(태종 14년) 33명을 뽑는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종6품인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가 되어 관계(官界)에
나갔다. 그 후 승문원교리(承文院敎理)·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예조좌랑(禮曹佐郞)·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했다.
관계에
나아가 초년은 그리 순탄하지가 않았다. 승문원 교리 시절에
사대문서(事大文書)에 날인이 잘못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고,
병조좌랑 시절에 비상동원령 잘못으로 탄핵을 받기도 했으며,
명나라 사신이 입국함에 황색의장을 걸지 않아 또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취각(吹角)하는 병사들을 잘못 훈련시킨
죄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여 고난이 뒤따랐다. 그러나 공(公)은
한 번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으며 남을 원망하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으니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두가 신뢰(信賴)하였다.
1420년(세종
2년) 상왕인 태종(太宗)이 대소신료가 모인 자리에서 공(公)을
앞으로 나오게 하고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림에는
훌륭한 인재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인지는
이 일을 충분히 해낼 인물이다."라고 하면서 세종에게
천거하였다.
그
후 공은 세종의 신임을 받아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관직 인사를 관장하는 이조정랑(吏曹正郞) 예절과 예술을
관장하는 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을 역임했으며 이 시절에
<변계량>·<조말생>·<정초>·<윤회>·<신장>·<이맹균>등
후에 대제학에 오른 명사들을 만나 친분을 맺고 교우하였다.
공은 요직(要職)에 오래 있으면서도 거만하거나 아첨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고 촌보도 사(私)가
없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대성(大成)할 분으로 생각하였다.
1422년(세종
4년) 당대의 준재(俊才)들이 모여 일하는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집현전 응교(集賢殿 應敎)가 되었고, 1423년(세종
5년) 당감(唐鑑)을 집필하였으며 춘추관춘추(春秋館春秋)를
겸직하였다. 1424년(세종 6년)에 직집현전(直集賢殿)이
되고, 1425년(세종 7년)에 대제학(大提學) <변계량>이
공(公)을 사학(史學)에 밝다고 천거하여 그 때까지의 모든
역사를 바르게 정리하였으며 <박연>등과 아악·당악·향악의
모든 악기·악곡·악보 등을 통합 정리하기도
하였다.
1427년(세종
9년) 예문관 응교(禮文館應敎)를 겸직하여 왕세자빈 죽책문(竹冊文)을
지어 바쳤고 특별 승진시험으로 시행된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관계(官階)가 2단계나 오른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올랐다. 이는 공이 조선조 최초로 과거를 차례로 세 번
모두 장원한 기록을 남겼으며 이때부터 "글 하면 정인지"라
하였다. 후세에도 많은 재사(才士)들이 이 기록을 깨려
하였으나 깨지 못하고 있다.
공은
<김종서>와 서장관(書狀官), 그리고 검찰관(檢察官)으로서
국가 공직기강을 바로잡는 일에도 참여했으나 이는 잠시였고,
곧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필선(左弼善)을 겸직하여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428년(세종
10년) 33세에 집현전 부제학(集賢殿 副提學)에 승진하여
당상관(堂上官)의 반열에 올랐으며 세종께 경서를 강독하고
질문에 답변하는 경연(經筵)의 시강관(侍講官)을 겸하게
되어 천문지리 등에도 자문하고 과학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430년(세종 12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고
아악을 정리하여 아악보(雅樂譜)를 완성 서문(序文)을 찬진하였다.
1431년(세종
13년)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직하였으며
역법인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태양·달·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의
운행계산법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찬집하였다. 공은
과학에도 통달했던 분으로 이를 지켜보던 세종이 "정인지만이
이것을 함께 의논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공에게
모든 과학기기 발명에 대한 이론과 원리를 담당케 하였다.
1432년(세종
14년)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이 되었고 춘추관 동지사(春秋館
同知事)를 겸하였으며 독권관(讀卷官)의 대임(大任)을 맡아
많은 인재를 책임지고 선발하였다. 공은 당대를 대표하는
독보적 문사(文士)로서 시권(試券)의 필서(筆書)를 보면
공부한 양을 알 수 있었고 뜻을 보면 해독(解讀)의 정도를
헤아리게 되었으니 어떤 인재라 할지라도 공의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따라서
공이 선발한 사람 중에 집현전에서 관록을 쌓아 성공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공을 가리켜 생명과도 같은 은인(恩人)이자
스승이라 하여 은부(恩傅)라고도 하였다. 공은 관직의 중책을
맡아 밤낮으로 분망하면서도 고향에 홀로 계신 부친을 잊지
못하였다. 이로써 벼슬길을 접고 낙향(落鄕)하고자 여러번
고심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려 사직 상언을 하였다.
이
상소문에 "신(臣)은 나이 13세에 부모를 멀리 떠나
성균관에 유학하다가 등제(登第)하여 벼슬길에 올라 어버이를
봉양할 겨를도 얻지 못하였던 때에 자모(慈母)를 일찍 여의었습니다.
이제 편부(扁父)의 나이도 70이어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지만 길이 막히고 소식이 드물어 가까이 첨망(瞻望)할
생각이 마음에 간절하옵니다."라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1433년(세종
15년)에 다시 부모공양을 위해 사직 상언을 하였다. 이
상소문에 "신(臣)이 어릴 때부터 부모의 슬하를 멀리
떠나서 한 해라도 어버이 곁에 모시고 있음을 얻지 못하였는데
자모(慈母)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슬퍼하여도 따를 수
없습니다. 홀로 있는 아비가 또 나이 70이 넘었는데 병환이
갑자기 일어났으니 남은 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세종은 "앞으로 역마를 주어 틈틈이
돌아보게 하겠다."라고 하시며 또한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이를 왕명(王命)이자 하늘의 명(命)으로 받아들여
섬기기를 다하였으니 왕실(王室)과 의정부(議政府)의 대신들이
공의 효성(孝誠)스러움에 탄복하였으며 또한 충성(忠誠)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고 한다. 얼마 후 인수부 부윤(仁壽府
府尹)에 제수되고 <정초> 등과 천문이론에 대한 고전을
연구하여 과학적 이론을 정립했으며 <이천> 등이
천문관측기구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는데 있어서도 공을
세웠다.
1434년(세종
16년) 이조 좌참판(吏曹 左參判)에 제수되고, 다시 예문관
제학이 되어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찬집했다. 1435년(세종
17년) 성균관 가대사성(假大司成)을 겸직하여 명나라 사신(使臣)을
접대했고 이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 觀察使)에 제수되어
제천 의림지 등을 보수했으며 양민을 규휼하는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니, 세종께서 "정인지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한 사람이다."라고 칭찬하였다.
1436년(세종
18년)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쳐서 곡식을
받는 일종의 빈민구제책으로 사창(社倉)의 설치를 주창하였다.
그리고 영동현감이 일은 하지 않고 놀기만 즐기자 임금께
상언하기를 "이런 사람을 두고는 하루도 관찰사를
할 수 없다."라고 상소하여 현감이 파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친이 작고하시어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으로서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자 <정분>에게 관찰사 직을
인계하고 부여 석성에 있는 부모 묘소에 초막을 짓고 상제(喪祭)를
치르게 되었다.
공은
목민관(牧民官)으로서 백성을 불쌍히 여기어 빈궁(貧窮)하지
않도록 최선을 하였고 또한 부모를 찾아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으니 천세토록 공의 얼이 빛나리라 생각한다. 1438년(세종
20년) 공이 상중에 있어 벼슬길에 오를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신 세종이 공을 특별히 기복(起復)시키고자 하여 기복출의첩(起復出依牒)을
내려주시니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서용되었다.
1439년(세종
21년) 집현전 제학을 겸하고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자 사대문서(事大文書)를
참예하여 그동안 밀렸던 국가 대소사를 일거(一擧)에 정리하니
이를 보고 놀라지 않는 관리가 없었다. 1440년(세종 22년)
다시 형조참판에 전입되었으나 세종이 형조판서인 <정연>에게
묻기를 "경을 대신할 만한 자가 누구냐."고 하자
"정인지가 재주와 덕망이 출중합니다."라고 천거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되었다.
이
해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오면서 역법·아악·음운서
등 외국 문물 서적을 다수 들여와 보급하였고 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에
임명되었다. 1441년(세종 23년) 풍수제조(風水提調)를 겸직하고
있어 한 때 경복궁(景福宮) 명당 터 논의가 분분하여 일부에서
옮기자고 하였으나 공이 이를 반대하여 이전하지 않았다.
1442년(세종
24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제수되었고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도
겸직했으며 이때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했다. 조종(朝宗)에
많은 관직이 있지만 공이 대제학에 올랐다고 하는 것은
학자로서 명예의 최고봉이자 가문의 영광이며 그 존귀함이
극에 달했던 자리로서 만 백성이 우러러보는 선망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1443년(세종
25년) 전제상정소제조(田制詳定所提調)를 겸직하여 충청·전라·경상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가 되어 전국을 다니면서 전품(田品)을
심사하였고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444년(세종 26년) 전품을 심사하던 중 남원의 광통루를
보고 그 경관이 달나라에 있는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와
같다고 하여 광한루(廣寒樓)라 친필을 쓰고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함평의 관정루(觀政樓)에
기문(記文)을 써서 남겼으며, 파주의 광탄 찬시(廣灘讚詩)도
썼다.
당시
전품을 심사하여 등급을 정하는 것은 국가로 보면 부국(富國)의
요체이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민생(民生)과 민원(民怨)이
상존하고 있어 누구도 쉽게 이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대제학의 신분으로 "모름지기 학문이
있어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을 배워 무엇에
쓰려는 것이냐"고 하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몸소
실천하였다.
1445년(세종
27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되어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하였다. 서문(序文)에 "다스린 자는 일어나고
어지러운 자는 망하나니 얻고 잃음이 함께 지나간 역사에
실려 있고, 착한 것을 본받고 악한 것을 경계함은 권장하고
징계함이 마땅히 후인에게 보여줍니다."라고 썼다.
이때 공의 직급이 자헌대부(資憲大夫)의정부 우참찬·집현전
대제학·지춘추관사·세자우빈객 등 여러 관직을
겸하였다.
1446년(세종
28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제수되었고 한글창제 최고
책임자인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집현전 응교 <최항>,
부교리 <박팽년>·<신숙주>, 수찬 <성삼문>,
돈녕부 주부 <강희안>, 행집현전 부수찬 <이개>·<이선로>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하였고 서문을 찬진했다. 이
서문에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한글 창제일을 음력
9월 상한이라고 하여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정하게 된 역사적
근거가 되었다.
1447년(세종
29년) 조선 개국의 창업을 칭송한 서사시(敍事詩)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찬진했으며 본문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므로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냇물이 이르러 바다에 가나니"라고
하는 대목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이해
공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고 <소헌왕후>
영릉지문(英陵誌文)도 찬진하였다. 그 지문에 "왕후는
자상하고 어질고 성스럽고 착하신 것이 천성에서 나와 중궁(中宮)의
자리에 앉으신 뒤로 더욱 겸손하고 삼가하여 빈첩(嬪妾)들을
예의로 대접하고 아래로 궁인(宮人)들에게 이르기까지 어루만져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지 않음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당연직의 과거 시관이 되어 중시에
집현전 출신 <성삼문>·<김담>·<이개>·<신숙주>·<박팽년>·<최항>
등을 선발하였고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찬시(讚詩)도 썼다. 공(公)은 "집현전이 잘 되어야
나라가 잘 된다"라는 신념을 갖고 학사들의 행실을
질책하며 계도했으니 모든 학사들이 "정인지를 통하지
않고는 되는 일이 없다."고 할 만큼 절대적이었다.
1448년(세종
30년) 태조실록(太祖實錄)을 총감수하여 개수했으며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집현전대제학·지춘추관사·세자우빈객·성균대사성을
겸직하였다. 1449년(세종 31년) 고려사(高麗史) 재편집을
위해 편집관(編輯官)에 임명되었고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전임되었다.
1450년(세종
32년) 명(明)나라 사신(使臣) <예겸>이 왔을 때 사신접대
총책임자로 관반청사(館伴廳事)가 되었고 직집현전 <성삼문>,
집현전 응교 <신숙주> 등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양국의 문물과 제도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때 몇날 며칠을
공(公)과 대면하였던 <예겸>은 공(公)에게 이르기를
"그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10년 동안 글읽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면서 관반청사 원접사 모두를 칭하하였다.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체직되고 하위직급에
있던 사람이 공보다 먼저 위로 올라가니 사론(士論)이 좋지
않아 다시 공조판서에 전임되었다. 그러나 공은 관직에
대해 추호(秋毫)도 욕심을 내지 않았으며 주역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하늘의 순리(順理)를 쫓아 세상을 사는 것에
만족하니 세인(世人)들이 공을 가리켜 대인(大人)이라 하였다.
1451년(문종
1년) 춘추관 지사(知事)를 겸직하여 고려의 역사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김종서>와 함께 편찬하고 지경연사(知經筵事)도
겸직하여 문종을 보필했다. 1452년(문종 2년)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했고 실록 총감수책임자로 세종실록(世宗實錄)은 물론
조선의 지리 및 문물 등을 총망라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도
찬집하였으며 세종의 영릉비문(英陵碑文)을 지어 바쳤다.
그리고 문형(文衡)을 맡은 대제학으로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할
인물로 <홍응>, <최항>, <박원형>, <김수온>,
<서거정>, <유성원> 등을 추천하였다.
3.
단종·세조대의 관력과 업적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전임되었고 이 때 대신(大臣)들이
군사를 풀어 사사롭게 사저(私邸)를 증축하자 이에 부당함을
지적했으며 동교(東郊)의 기문(記文)을 썼다. 그러나 얼마
후 한직(閑職)이라 할 수 있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체직되었다. 공(公)은 성품이 온유하면서도 기개가 대쪽같아
불의와 타협할 줄 몰랐으며 잘못을 지나치는 일이 없었으니
모든 대소신료가 두려워하여 근신하였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대책(大策)을 참결(參決)하고
<수양대군>이 세상을 평정하니 대군의 천거로 좌의정(左議政)에
제수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병법(兵法)에도 조예가 깊어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이석형> 등과 편찬했다.
공은
"신권(臣權)정치를 배격하고 왕권(王權)정치를 치국(治國)의
정도(正道)"라 하였던 분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세론(世論)에
의기투합하는 사람을 보고는 소인배(小人輩)라고 하면서
자식들에게도 이를 훈계하여 세정(世情)을 모르고 사는
것을 가문의 덕목으로 여기게 하였다.
1454년(단종
2년) 수양대군의 딸 의숙공주(懿淑公主)를 며느리로 맞아들여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었고 세조가 즉위하자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영의정(領議政)에 제수되니 조선왕조
최초로 장원급제자가 영의정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세자사(世子師)도
겸직하고 실록 총감수 책임자가 되어 문종실록(文宗實錄)을
편찬했다.
단종과
세조 연간에 왕위 계승이 양위냐 찬탈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가치관이 혼돈되면서 충절과 변절, 옳고 그름으로
세론(世論)이 이분(二分)되었을 때 공은 "누구나 나라의
부름을 받기 위해 함께 공부한 선비라 할지라도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 그 가는 길을 두고 서로 말하지 않는 것이
선비된 도리요 신하된 도리"라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엇은 옳고 무엇을 그르다고 하여 다툼이 있을
때면 "행여 아는 것에 비해 기(氣)가 넘침을 경계하고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면서 "나도 그들과 같이
세상을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1456년(세조
2년)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나 사육신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집현전 후학(後學)들이 관련되어 사형되고 집현전이
혁파되자 수십 년간 집현전을 이끌어온 대부(代父)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영의정을 사직하는 걸해골(乞骸骨)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 "신(臣)이 날로 점점 쇠하고 늙어서 이가
빠지고 눈이 어두우며 정신이 잊기를 잘하여 때로 두풍이
발작하니 걸해골하여 병을 조섭하고 다스리고자 합니다."하였으나
세조는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육신 등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된 자들이 쇠 담금질로 문초(問招)를 당하자 공께서
어전에 나가 아뢰기를 "전하, 저들은 전하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집현전 후학들이
소신껏 행동하는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문초가
부질없음을 간하는 것이었다.
1458년(세조
4년) 중삭연(仲朔宴)과 기로연(耆老宴) 석상에서 불서(佛書)
간행을 반대하여 세조에게 "임금이 불사만 전념하니
하루도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하면서 "내가
그대를 그렇게 가르쳤느냐"고 따져 묻고 영의정직을
스스로 사직하였다. 역사에 임금을 두고 "그대"라는
말을 쓰고도 살아남은 이가 공(公) 뿐이시니 공(公)은 도도함과
당당함의 평상심을 한 번도 잃지 않으셨고 언제나 의연하게
행동하였다.
세종에
이어 문종 그리고 세조에 이르기까지 왕실이 불사를 일으키려는
것을 보고 끊임없이 홀로 반대하였으니 이는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을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한 정당성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1459년(세조 5년) 임금에 대하여 공(公)이 불경(不敬)하였다는
논쟁이 장기화되면서 명예며 관직 등 고신(告身)을 모두
박탈당하고 부여에 부처(付處)되었으나 얼마 후 풀려나
부원군 군호(君號)를 환급받았다.
1463년(세조
9년) 충훈부 당상(忠勳府堂上)이 되었고 과거 시관을 겸직하여
인재 선발에 힘썼다. 1465년(세조 11년) 명(明)나라 사신이
왔을 때 가관관(假館官)에 임명되었으며 세조의 대원각사
낙성법회에도 참석하였다. 1467년(세조 13년) 과거 시관을
겸직하여 역시 인재를 선발하였다. 공은 춘추가 연로(年老)하심에도
사서오경을 즐겨 암송하였고 시관이 되어서는 눈을 감고서도
듣기만 하면 급제자를 골라내시니 사람들이 "시관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배운 사람이라야 한다"라고
하였다.
1468년(세조
14년) 며느리 의숙공주와 오대산 상원사 중창낙성식에 참석했고
금강산 유점사 대종봉정식에 참석하여 대종기(大鐘記)를
썼다. 세조는 공이 귀양까지 갖다 오면서도 맑으나 궂으나
한결같이 조종을 섬기는 것을 보고 치하하여 나이 70세
이상의 권신(權臣)에게 특별히 주는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4.
예종·성종대의 관력과 업적
1469년(예종
1년) 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한 공로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공(公)의 자손들에게도 이르기를 "익대
3등공신 정인지의 후손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함이 있을지라도
유사가 영세에 미치게 된다."하였다. 1470년(성종
1년) 국가의 원로대신으로서 국정을 총괄하는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년) 어린 임금을 잘 보필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둘째아들 현조(顯祖)가 좌리공신 1등,
셋째 아들 숭조(崇祖)가 좌리공신 4등에 책록되어 3부자(三父子)가
공신이 되었다. 노년(老年)은 정원(廷園)에 나가 전지(田地)를
돌아보며 농부들과 막걸리를 즐겨 드셨다. 그리고 불사(佛事)를
일으키려다 세상을 뜬 의숙공주를 위해 시전공양에 전념했고
승가사(僧伽寺) 찬시(讚詩)를 지었다.
1475년(성종
6년)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끝나고
원상 제도가 폐지되자 일체의 공사직(公私職)에서 물러나
봉직 62년의 공직을 마감했다. 1478년(성종 9년) 조정에서
공(公)의 공적을 기려 왕의 스승으로 모시는 삼로(三老)에
추대하려 했으나 임금에 아뢰기를 "노신(老臣)은 그저
조용히 지내기만을 소원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해
11월 25일 마지막으로 아들, 딸, 손자, 증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너희들은 언제 어디서고 하동부원군 자손임을
명심하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춘추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공(公)이 영면(永眠)하자 나라에서 조정을
철조(輟朝)하고 부물(賻物)을 내려 예(禮)로서 장사지내게
했으며 시호(諡號)를 문성(文成)이라 하였으니 이는 도(道)와
덕(德)을 널리 깨달아 글이 높으셨던 분으로 죽는 날까지
섬기기를 다하여 부족함이 없이 글을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
5.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선생은
효심이 지극하고 글재주가 뛰어났다. 초년은 효자(孝子)로서
중년은 학자(學者)로서 그리고 말년은 정치가(政治家)로서
대성(大成)하여 부(富)와 명예(名譽)와 권세(權勢)까지
다 누린 분이다. "장차 가문을 빛낼 아들을 소원"했던
부친의 뜻을 받들어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 때문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은 못했으나 장자인 익위공
광조(光祖)께서 단종 유배 후 자결로써 대신했다고 본다.
조선 최고의 명문가(名門家)를 만들었으며 600년 세가(世家)의
존귀함을 지킨 분이다.
공(公)은
생원시 문과 중시에 세 번 모두 장원급제하여 학풍이 뛰어났으며
당대에 편찬된 모든 서적이 공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많은 저술에 업적을 남기셨다. 성품이 호한하고
영매하여 남과 다툼이 없었고, 또한 다툼을 받아주지도
않으셨으며 처세와 처신에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언제고
마음을 다스려 행동을 경계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직언했으니
후학은 물론 왕실에서도 두려워하여 거유(巨儒)라고 칭송하였다.
조선조
3대 임금 태종에서 성종까지 무려 7대 왕조(王朝)를 섬기며
예문관 대제학과 집현전 대제학을 지냈고 형, 예, 이, 공,
병조의 5판서를 두루 거쳐 좌의정과 영의정에 까지 올랐다고
하는 것은 역사가 재평가하며 연구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효행을 대본(大本)으로 삼고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실사구시(實事求是)로 대의(大義)에 충실했던 공(公)의
강직한 성품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태종
1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종 6년 원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
60여 년간 조선조 국기확립(國紀確立)과 문화창달(文化暢達)에
초석을 다졌고 30여 년 동안 과거시험 시관(試官)이 되어
문과(文科)와 중시(重試) 등을 통해 <신숙주>·<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김담>·<최항>
등 많은 인재를 선발하여 배출했다.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후학의 명망을 받아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고려사, 치평요람
등을 편찬하여 우리나라 문풍발전에 지평을 열어준 것이다.
불교와
유교의 논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갈등이 소용돌이치던 계유정난, 단종 복위운동 그리고 남이옥사
등 큰 사건을 만났어도 공은 오히려 담담하고 냉철했으며
치졸(稚拙)함을 보이지 않았다.
공(公)이
이르기를 "학자는 청죽(靑竹)과 같아 선비로서 현실정치를
경원하여야 하지만 정치가는 노송(老松)과 같아 길손에게
비바람을 피하고 쉬어갈 거처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 선생의
위대한 사상(思想)과 철학(哲學)이며 경륜으로서 우리나라의
영원한 귀감(龜鑑)이 될 것이다.
|